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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헌의 스포츠 세상

손기정,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영원한 마라토너다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1-07-01 09:30:59

 
▲박병헌 언론인·전 세계일보 체육부장
/마라톤 결승선 1위 통과에도 고개 숙여
/일장기 말소 언론사들 역사적 수난 겪어
/뒤늦게 받은 부상 청동투구 보물로 지정
/일본, 아직도 손기정을 일본인이라 망발
 
1936년 8월 9일 따가운 햇살이 쏟아지던 독일의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구름같이 몰려든 12만명의 관중은 숨죽이며 곧 스타디움으로 들어올 마라톤 우승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11회 베를린하계올림픽의 꽃이라고 할 마라톤 우승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지대했다. 특히 49개국 3963명의 선수가 출전한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더욱 그랬다. 독일 국민을 선동해 광적인 나치즘으로 몰고 가던 아돌프 히틀러는 아리아 인종이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장면을 독일 국민이 목격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인종주의적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결승점인 올림픽 스타디움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아리아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인도 아니었다. 그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온 작고 깡마른 청년 손기정이었다. 손기정이 1등으로 스타디움에 들어왔을 때 이를 중계하던 당시 독일의 장내 아나운서는 그가 일본 국적에 손기테이란 이름으로 올림픽에 참가하긴 했으나 한국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독일 역사박물관(DHM) 독일 방송기록보관실(DRA)에 보관된 자료에 따르면 장내 아나운서는 “한국 대학생이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그 한국인은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었습니다.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를 뚫고, 거리의 딱딱한 돌 위를 지나 뛰었습니다. 그가 이제 트랙의 마지막 직선 코스를 달리고 있습니다. 우승자 ‘손’이 막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라고 멘트했다.
 
당시 마라톤 역대 최고 기록
 
스타디움 안으로 달려온 손기정은 400m 트랙을 한 바퀴 돌며 마라톤 42.195km의 마지막을 채웠다. 결승선에 도착하기 전 그의 마지막 100m 기록은 11초였다. 전력을 다해 뛰는 동양에서 온 작고 다부진 마라토너의 얼굴엔 표정이 거의 없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고 담담하고 묵묵하게 결승선을 통과했다. 2시간 29분19초2. 당시 최고 기록이었다. 인간이 넘기 힘들다고 여겼던 마의 2시간 30분대를 넘어선 것이었다.
 
손기정은 결승선을 통과한 뒤 환호하지 못했다.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레이스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운동화를 벗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탈의실로 퇴장했다. 올림픽 마라톤의 금메달리스트가 보일 수 있는 태도는 아니었다. 식민지 국민으로 앞가슴에는 일장기가 붙어 수치스러웠기 때문이었다.
 
191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난 손기정은 너무나 가난해서 달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소년이었다. 소학교 다닐 무렵 해일로 집안이 몰락한 뒤 어린 시절부터 장사에 나서야 했고, 16세 무렵에는 중국 단둥의 회사에 취직했다. 손기정은 차비가 없어서 신의주∼압록강 철교∼단둥에 이르는 20여리 길을 매일 달려서 출퇴근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가난이 그의 체력 단련과 마라톤에 큰 도움이 된 것이다.
 
스케이트 선수를 동경했던 소년
 
손기정은 어릴 때부터 달리기뿐만 아니라 여러 운동에 소질을 보였다. 그는 품팔이와 배달일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겨울에 얼어붙은 압록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또래들을 무척 부러워했다고 한다. 스케이트를 살 돈만 있었다면 스케이트 선수를 했지 고통스러운 마라톤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운동의 소질을 살릴 수 있는 길은 돈이 들지 않는 달리기뿐이었다. 손기정은 소학교 6학년 때 안의전(중국 안동과 신의주 간 대항경기)에 출전해 성인들을 제치고 5000m에서 우승했고, 1931년 10월에는 전국체육대회에 평안북도 대표로 출전해 5000m에서 2위를 했다. 이듬해 1932년 동아일보 주최 하프마라톤에서 2위를 하면서 이 인연으로 서울 양정고보에 입학하게 된 그는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하게 됐고, 본격적으로 마라톤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그저 혼자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선수로서 훈련을 받은 손기정의 실력은 나날이 성장하였다. 손기정은 1933년부터 1936년까지 13번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10번이나 우승했다. 이러한 발군의 실력으로 인해 일본의 올림픽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식민지 조선인에게 희망과 용기
 
비록 일본 국적으로 나가서 딴 올림픽 금메달이었지만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소식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는 한없는 기쁨과 희망이요, 용기 그 자체였다. 올림픽에 기자도 파견하지 못한 식민지 언론사는 일본 신문에서 받은 사진으로 금메달 획득의 낭보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밖에 없었다.
 
손기정이 금메달을 딴 지 나흘 후 민족운동가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는 인쇄 품질이 나쁜 점을 이용해 일장기가 흐려져 잘 보이지 않게 만든 뒤 사진을 신문에 올렸다. 이 일장기 말소 문제가 크게 불거진 것은 동아일보에 다시 한번 이 사진이 게재되면서였다. 손기정이 비록 일본 국기를 달고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그가 조선인임을 자부하고 싶은 언론인들의 항거였다. 결국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됐고, 동아일보는 9개월간 정간을 당했다.
 
손기정은 월계수 나무로 일장기를 가리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이후 경기 출전이 금지되었으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영광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지만 식민지의 금메달리스트는 일제로부터 합당한 대우조차 받지 못했다. 1944년 손기정은 조선저축은행 은행원으로 일하면서 일장기 말소사건 때 인연을 맺은 여운형을 도와 독립운동의 연락담당 역할을 하기도 했다.
 
광복 후 손기정은 1947년과 1950년에 마라톤 코치로 활동하며 서윤복과 함기용이 미국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후 손기정은 대한체육회 부회장, 1988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며 체육계에서 활약했다. 베를린올림픽의 마라톤경기에는 그리스 아테네의 한 신문사가 우승자에게 수여하는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가 부상으로 있었다. 이 투구는 손기정에게 바로 전달되지 못하고 50년간 베를린의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가 1986년에야 손기정에게 전달됐고, 손기정은 이를 1994년 국가에 기증했다. 이 청동투구는 외국 유물로는 유일하게 그 역사적 가치로 인해 보물로 지정됐다.
 
“나의 평생 소원은 한국인 손기정”
 
손기정의 금메달은 현재까지도 일본이 딴 금메달로 돼 있다. 올림픽 공식 기록에는 손기정의 국적 또한 일본, 이름도 손기테이로 되어 있다. 손기정은 살아생전 “나의 평생 소원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손기정으로 기억되는 것이다”고 청원했다. 한국 정부와 손기정은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 무척이나 애썼지만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국적 변경 신청을 받아주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IOC 홈페이지에는 당시 한국은 일제강점기였다는 역사적 설명과 함께 손기정이 한국인임을 밝히고 있다.
 
다음달 개막될 도쿄올림픽 주경기장 주변에 위치한 올림픽박물관에 손기정이 일본인인 것처럼 전시돼 논란이 되고 있다. 2002년 11월 영면에 들어간 손기정이 하늘에서도 비분강개할 일이다. 일본이 과거 제국주의적 한반도 침략에 사죄하지는 못할망정 손기정을 일본인으로 둔갑시키는 행태를 되풀이해서는 안 될 일이다. 손기정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영원한 마라토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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