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국면부터 ‘한·일 정상 간 셔틀외교 복원’을 주장해 온 윤석열정부 출범 이후 한·일 양국 모두에 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높다. 강제동원 피해배상 문제에 대한 대법원의 결정이 임박하면서 한일 관계가 이번주 중대 분수령을 맞을 전망이다.
한일관계 정상화의 중심에는 ‘강제동원 배상판결 이행’이 놓여 있다. 2018년 대법원이 일본 전범기업들에게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판결하자, 일본 정부는 “국제법 위반”이라며 가해 전범기업의 배상판결 이행을 막았다. 자산 현금화를 ‘레드라인’으로 설정하며 한·일관계 갈등의 뇌관으로 해당 사건이 떠오른 것이다.
위안부 협상 파기와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에 당시 일본 정부는 ‘수출규제’ 등으로 맞불을 놓았으며 반일·혐한 분위기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최근에는 강제동원 배상 판결 이행을 거부한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 현금화와 관련한 대법원 결정이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오는 상황이다. 양국 외교가와 관련 당사자들이 합의의 접점을 찾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지난달 29일 외교가에 따르면 26일 한·일 양국은 도쿄에서 국장급 협의를 개최했다. 이상렬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과 후나코시 다케히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한·일 국장급 협의로 제반 현안을 비롯해 강제동원 배상 문제 해법이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일본 외무성은 국장 협의가 끝난 뒤 보도자료를 통해 “옛 한반도 출신 근로자 문제에 대한 한국 측의 생각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며 “이에 대해 외무성은 한·일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기 위해 일본 측의 일관된 입장에 따라 한국 측에 책임을 가지고 대응하도록 요구했다”는 원론적 입장을 재차 피력했다. 외교 당국 간 의사소통을 계속해서 나가겠다는 여지를 남기면서도 일본 정부는 해당 안건의 공을 한국 측에 넘긴 것이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도 올해 1월 정기국회 개회식 시정방침 연설에서 “한국 정부에 적절한 대응을 강하게 요구할 것”이라며 한국 측에 해결책임이 있다는 취임 당시부터의 기존 견해를 재확인했다. 일본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한·일 정상회담과 관련해 강제동원 문제 등 여러 현안에 대한 자세를 판별해 대응하겠다며 한국 측이 먼저 해결방식을 제안해야 한다는 기존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13년 만에 승소’한 강제징용 판결→최악 치달은 한·일 관계
앞서 여아무개씨 등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4명은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일본 법원에 소송을 냈다 패소한 뒤 우리 법원에 다시 소송을 냈으나 1·2심에서 다시금 모두 패소했다. 3심인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2012년 5월 “일본 법원의 판결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으로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라며 원심을 깨고 사건을 돌려보냈다.
일제 식민지배로 피해를 본 한국인이 일본 기업에 승소한 최초의 사법적 판단이었다. 김 대법관은 주위에 “건국하는 심정으로 판결문을 썼다”고 밝힌 것이 두고 두고 회자될 만큼 이례적 판결이기도 했다. 이듬해 서울고법은 원고들에게 각각 1억원 씩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뒤 같은 해 8월 재상고됐으나 박근혜정부의 ‘양승태 대법관 체제’하에서 재판은 5년2개월동안 연기됐다. 문재인정부 시절인 2017년 7월에야 전원합의체에 넘겨졌으며 같은 해 10월30일 전원합의체는 일본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한일 청구권 협정은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 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며 “일본이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피해배상을 부인했기 때문에 피해자 개인의 위자료 청구권이 협정에 포함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을 인정해 ‘개인당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으며 일본제철의 한국 내 자산을 대상으로 강제집행 절차가 시작됐다.
13년 만에 강제동원 손해배상 청구권소송 판결이 마무리되자 일본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2라운드의 시작이었다. 일본 측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한국 국민 개인의 청구권은 이미 소멸한 만큼 (회사측의) 배상 의무가 없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며, ‘자산 현금화’에 강하게 반발했다.
실제 당시 청구권 협정 2조는 ‘(한·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고 돼 있다. 이 협정에 따라 일본 정부는 한국에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3억달러’를 제공했다. 이후 일본 정부는 1965년 협정으로 한국인의 개인적 청구권도 없어졌다는 입장을 견지해왔고 일본 법원도 같은 취지의 견해를 고수했다.
현재는 미쓰비시중공업 특허권을 매각할지에 대한 대법원의 결정이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애초에 19일이 심리기일이었는데, 판결을 담당한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미쓰비시 측이 특허권 특별현금화(매각) 명령에 불복해 재항고한 사건과 관련해 당일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고 유보한 상황이다.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이 나오지 않은 것은 재항고에 대한 심리가 일단 진행될 가능성이 있는데, 특례법에 따르면 통상 대법원은 상고 기록을 받은 날로부터 4개월 이내에 기각 여부의 결정을 내린다. 이번 재항고 사건은 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가 당사자인 소송으로 일본 기업이 지급해야 할 배상금의 강제집행 여부와 관련한 사안이다.
4월19일 소송 기록이 대법원에 접수됐고, 4개월이 넘어서 기각 결정이 내려지지 않음에 따라 심리를 거쳐 수일 내로 사실상 정식 결정이 내려질 개연성이 높아졌다.
실제 외교부는 7월26일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해 한·일 양국 간의 외교적 협상 과정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외교부는 “다각적인 외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 주시기 바란다”고 요청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도 지난달 19일 국회 외통위 전체회의에서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행을 거부한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 매각(현금화) 관련 대법원 결정 가능성에 대해 대법원의 판단을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만약 심리불속행으로 대법원이 미쓰비시중공업이 낸 재항고를 기각하면 한국 법원은 이미 압류한 미쓰비시의 자산을 내다 팔 수 있게 된다. 외교가에 따르면 전범기업 자산에 대한 현금화 절차가 개시될 경우 일본이 정한 ‘레드라인’을 넘어서게 된다. 이에 자국 기업 보호를 위한 명분으로 보복조치를 들고 나오면 한국에서도 새로운 보복을 내놓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결국, 대법원이 현금화 명령을 받은 일본 기업의 재항고에 관한 판단을 내놓게 된다면 한·일관계는 회복 불능 수준으로 추락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피해자들, ‘우리 정부가 대신 갚아 준다’는 尹정부 ‘대위변제안’ 거부
이 같은 파국을 막기 위해 정부는 강제동원 문제를 전담할 기구를 만들어 해법을 모색하고 일본 정부와 협상을 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왔다. 이에 배상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기 위한 민·관협의회가 7월4일 첫 회의를 열고 출범했다. 조현동 외교부 1차관이 주재한 회의에는 정부 인사와 전문가, 피해자 측 관계자 등이 참여했다.
의회는 이르면 가을로 예상되는 일본 전범기업의 국내 자산 현금화(매각) 결정이 나오기 전에 외교적 해법을 도출하기 위한 의견수렴에 집중할 계획으로 이날 기준 세 차례 민·관협의회를 열어 피해자 측 관계자와 학계, 법조계 인사 등의 의견을 수렴해 왔다.
그럼에도 피해자 측은 신뢰 훼손 등의 이유로 3차 협의회부터 불참하며 난항이 빚어지고 있다. 외교부는 나머지 구성원과 민관협의회를 이어가면서 피해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통할 예정이다. 유효한 해법이 되려면 피해자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국민 여론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피해자 대리인·지원단은 ‘피해자와 일본 기업의 직접 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가 밀어온 건 ‘대위변제안’이다. 한국 정부가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이후 일본과 기금을 조성하는 방식인데, 피해자 측은 이를 거부하며 대치 국면이 깊어지고 있다. 피해자 측은 “미쓰비시 측의 진솔한 사죄와 배상 이외에 다른 해결방안이 있을 수 없다”며 “정부는 정체가 모호한 ‘민·관협의회’ 대신, 지금부터라도 다시 눈을 일본을 향해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정부가 대신 배상하는 대위변제는 있을 수 없다고 못을 박으며 평행선을 달리는 견해차를 재확인해준 셈이다.
그럼에도 윤 정부는 해결방안을 찾는 데 적극적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한·일 관계와 관련해 “강제동원은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나왔고 그 판결 채권자들이 법에 따른 보상을 받게 돼 있다”고 밝혔다. 이어 “다만 그 판결을 집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일본이 우려하는 주권 문제의 충돌 없이 채권자들이 보상을 받을 방안을 지금 깊이 마련하고 있다. 저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외교적 해법’을 마련하면서도 피해자 측에 배상 문제도 해결하겠다는 ‘일망타진’의 해결방식을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에 반대한다는 윤덕민 주일본 한국대사의 소신 발언도 주목을 받고 있다. 윤 대사는 8일 대사 취임 이후 가진 첫 특파원 간담회에서 현금화를 먼저 막고 사법적 영역이 아닌 외교적 해법으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윤 대사는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 매각으로 일본의 보복과 그에 대한 한국의 대응이 이어지면서 피해가 커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현금화가 현재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 현금화가 되면 한·일 양국은 물론 기업과 국민 등에 천문학적 피해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외교가 대표 지일파로 꼽히는 강창일 전 주일대사도 외교적 해법에 주목했다. 강 전 대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치밀한 논리를 구성해 일본을 설득해야 한다”며 “강제동원 문제를 푸는 것이 일본을 위해서도 좋다고 말해야 한다. 일본은 현재 반중(反中), 반북(反北)을 하는데, 반한(反韓)까지 하면 아시아에서 외톨이가 되므로 서로 양보하며 풀어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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