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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요희의 詩요일] 한 장의 백지에는 백지의 전생이
백지 / 나호열 시인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3-09-30 10:51:21
백지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백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뿐이다
네가 외로워서 술을 마실 때
나는 외로움에 취한다
백지에 떨어지는 눈물
한 장의 백지에는 백지의 전생이 숨어 있다
숲과 짐승들의 발자국
눈 내리던 하늘과 건너지 못하는
강이 흐른다
네가 외로워하는 것은 그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만
네 옆에 내가 갈 수 없음이 외로움이다
그러므로 나는 숲에다 편지를 쓴다
길에다 하염없는 발자국에다 편지를 쓴다
백지에는 아무것도 없다
눈만 내려 쌓인다
 
백지(2007)/ 나호열
 
▲ 백지는 없다. 백지의 전생 위에 빼곡하게 쌓인 흰 눈이 그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
백지만큼 묵직한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도 없을 것이다
꼭꼭 감추어진 백지의 전생을 캐내는 일
지워진 숲과 짐승들의 발자국을 찾아내는 일
그것이 시인의 일이다.
백지는 눈 내리는 하늘이고
건너지 못하는 강이고
눈밭에 하염없이 새겨진 발자국이고
눈 그 자체이다.
 
백지는 없다
백지의 전생 위에 빼곡하게 쌓인 흰 눈이
그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외로움을 하얗게 지운 눈송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가 손을 호호 불어가며 눈밭에 쓴 글자들을
시라고 부르는 것이다.
 
임요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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