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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풍경 낯선 여행] 3월에 찾아가는 행촌동 은행나무집 ‘딜쿠샤’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테일러 가족
죽어서도 한국에 묻히고자 유언 남겨
임유이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2-29 13:38:23
  
▲ 딜쿠샤는 서울 종로구 행촌동 언덕배기에 오도카니 서 있는 2층짜리 서양식 건축물이다. 임유이 기자
 
올해는 딜쿠샤 100주년이다딜쿠샤는 서울 종로구 행촌동 언덕배기에 오도카니 서 있는 2층짜리 서양식 건축물이다. 이 집은 3·1운동을 최초로 세계에 알린 앨버트 테일러 전 AP통신사 특파원의 보금자리였다.
 
주인 잃고 귀신 나오는 집으로 불리던 딜쿠샤를 복원해 세상에 공개한 게 202131일의 일이다100년 세월을 한결같이 한 자리를 지킨 딜쿠샤에는 기억할 만한기억해야 마땅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우리 이곳에서 살아요
 
▲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령 400년의 행촌동 은행나무. 임유이 기자
 
1923년 어느 날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와 영국인 메리 테일러 부부가 산책에 나섰다가 인왕산 성벽 아래까지 오게 되었다. 그들의 눈앞에 키 큰 은행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다. 수형이 유려하고 잎과 가지가 무성한 나무였다. 부부는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보, 여기 정말 시원하지 않아요? 경치도 너무 좋아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여요. 이런 데 집 짓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내 메리의 말에 앨버트의 두 눈이 빛났다.
 
못 할 것 없지! 우리 이곳에 집을 지읍시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두 사람은 땅을 사들이자마자 공사에 착수했다. 그곳은 본디 은행나무가 서 있다고 해서 행촌동으로 명명된 곳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고른 땅은 조선 중기 권율 장군의 집터였다.
 
1년간의 공사 끝에 총면적 6242층짜리 붉은 벽돌집이 완성되었다. 테일러 부부는 이 집에 딜쿠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인도의 바로크 건축물 딜쿠샤에서 따온 이름으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들은 그만큼 이 집을 사랑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테일러 부부는 주택 입구에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일이다”(시편 1271)라는 성경 말씀을 새겨 넣었다.
 
3·1운동을 세상에 알리다
 
▲ 2층 벽난로가 있는 방은 딜쿠샤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전시실로 활용되고 있다. 임유이 기자
 
당시 앨버트 테일러는 광산업을 하면서 AP통신사 통신원으로 일했다. 대한제국의 소식을 나라 밖으로 부지런히 실어 나르며 이 땅의 현실을 세상에 알렸다. 3·1운동을 최초로 세상에 알린 이도 앨버트였다.
 
19192283·1운동이 있기 하루 전날이었다. 메리 테일러에게 산기가 있었다. 메리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들 브루스를 낳았다. 테일러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던 세브란스 간호사들은 메리 테일러의 침상에 문서 하나를 슬쩍 찔러 넣었다.
 
무심코 쪽지를 펴본 메리는 즉시 남편 앨버트에게 그것을 전달했다. 문서를 읽는 앨버트의 얼굴에 당혹감과 경이로움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것은 기미독립선언서였다. 그리고 앨버트는 동생 윌리엄의 구두 뒤축에 그것을 숨겨 외부로 반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공로로 기미년 3·1운동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테일러 가족은 그 후로도 줄곧 딜쿠샤에 머물렀다. 딜쿠샤를 가장 먼저 떠난 것은 아들 브루스였다. 1940년 입대를 위해 미국행을 택한 것이다.
 
브루스가 떠난 이듬해 미국과 일제 사이에 태평양전쟁이 터졌다. 미국인이었던 앨버트는 적국의 국민으로 간주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수감생활은 5개월 남짓 이어졌다. 영국인이었던 메리는 딜쿠샤에 가택연금되었다. 1942년 일제는 외국인 추방령을 내렸고, 테일러 부부는 쫓기듯 한국을 떠나야 했다.
 
내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다오!”
 
▲ 1997년 건축가와 역사가들이 딜쿠샤에서 찾아낸 것은 ‘DILKUSHA 1923’이라고 쓰인 머릿돌이었다. 임유이 기자
 
1948년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던 앨버트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메리는 태평양 너머에 내 나라가 있고 내 집이 있다. 내가 죽거든 화장해 꼭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미군함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엘버트의 유골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성공회 헌트 신부와 언더우드 가족의 도움이 있었다. 그리고 메리는 한국을 떠나기 전 딜쿠샤를 방문했다. 다행히 집은 온전했다. 메리는 붉은 벽돌 하나하나, 시편의 글귀를 어루만지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신의 가호였을까? 6·25전쟁으로 온 나라가 화마에 휩싸이는 중에도 딜쿠샤는 온전했다. 세월이 흘렀고 인왕산 언덕 벽돌집 딜쿠샤는 개발에서 철저히 소외된 채 하루하루 낡아갔다. 사람들은 이 집을 붉은 벽돌집’ ‘서양사람집’ ‘은행나무집’ ‘귀신 나오는 집으로 불렀다.
 
1959년 자유당 조경규 의원이 딜쿠샤를 매입했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그의 재산이 국가에 압류되면서 딜쿠샤도 국가 소유가 되었다. 국가는 딜쿠샤를 잊었다. 주인 없는 딜쿠샤를 거처로 삼은 이는 집 없이 떠돌던 사람들이었다. 비나 피할까 해서 들렀던 이들이 그예 눌러앉는 일도 있었다. 급기야 16가구가 넘는 가족이 딜쿠샤에 깃들어 살게 됐다.
 
▲ 16가구가 쪽방으로 개조해 살았던 내부 공간. 임유이 기자
 
딜쿠샤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1997년의 일이다. 유태흥 전 대법원장이 대한제국 시절 신문인 대한매일신보사옥으로 딜쿠샤를 지목하면서 신문 지상에 대대적으로 관련 기사가 실렸다. 심지어 서울시는 이곳을 신문박물관으로 꾸밀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건축가와 역사가들이 딜쿠샤에서 찾아낸 것은 ‘DILKUSHA 1923’이라고 쓰인 머릿돌이었다.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낙담한 서울시는 딜쿠샤가 어떤 곳인지 조사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다시 방치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한편 대한매일신보사 최초의 사옥은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할아버지·아버지의 나라를 찾아
 
▲ 메리가 그린 공서방과 김주사의 초상(위) 그리고 당시 주변 풍경. 임유이 기자
 
모두가 딜쿠샤를 잊는 중에도 결코 이 집을 잊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테일러 가족이었다.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2006년 가족과 함께 딜쿠샤를 찾았다. 한국을 떠난 지 66년 만의 일이었다. 20대 청년의 모습으로 떠났던 브루스는 어느덧 87세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브루스 테일러도 처음에는 집의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2005년 서일대학교 김익상 교수에게 딜쿠샤를 찾아 줄 것을 부탁한 끝에 자신의 생가로 돌아올 수 있었다.
 
10년 세월이 흘러 2016년 브루스의 딸 제니퍼가 한국을 찾았다. 제니퍼의 손에는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브루스(2015년 사망)의 유골함이 들려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유해를 딜쿠샤에 뿌렸다. 늦었지만 서울시도 딜쿠샤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20178월 딜쿠샤는 국가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지정되었다.
 
▲ 그 시절의 풍속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일부러 제작한 집기들. 붉은색 주칠원반을 제작하는 데는 6개월, 병풍을 제작하는 데는 1년2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임유이 기자
 
서울시는 20193·1운동 100주년에 맞춰 개방할 계획으로 복원에 착수했지만 입주민과의 법적 분쟁이 길어지면서 개방이 미뤄졌다. 모든 보상관계가 마무리된 202131일에야 딜쿠샤는 역사적인 개막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딜쿠샤 복원은 겹으로 이뤄졌다. 1·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의 생활공간으로 재현됐고 여섯 개의 방은 테일러 가족의 한국 생활과 취재 활동을 조명하는 전시실로 구성했다. 전시실에서는 그림을 좋아했던 메리의 미술 작품과 만날 수 있다.
 
전시관은 오전 9~오후 6시까지 운영되며 월요일은 휴무, 입장료는 무료다. 해설은 서울시 공공서비스예약을 통해 사전예약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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