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기준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처음으로 일본을 넘어섰다. 30년 전인 1995년 양국 국민의 소득 격차가 3만 달러까지 벌어졌던 것을 상기해 보면 실로 격세지감이다. 한국은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였지만 일본은 잃어버린 30년 여파로 계속 하강했다. 명목 국내총생산(GDP) 순위도 한국이 14위에서 12위로 올라섰고, 인구 5000만 명 이상 국가 중 1인당 국민소득 순위도 6위로 뛰었다.
이 정도면 일본에 대한 고질적 열등감이 극복되고 있다는 말이 타당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국민은 그리 기쁘거나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수치로 나타난 장밋빛과 달리 기업이나 가계 등 국가가 처한 경제 현실이 그리 밝지 않다는 압박감이 작용하고 있지 않나 싶다. 숫자적 놀음에 집착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는 단면이다.
한·일 간의 국민소득 역전은 환율이 만들어 준 결과물이다. 원화는 1300원 안팎으로 안정적이었던 반면, 엔화는 평균 환율이 140엔으로 6% 정도 평가절하되었다. 환율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 순위가 바뀔 수 있다. 일본은 구조적 개혁은 뒤로 미루고 기업의 회생에만 전력투구하면서 슈퍼 엔저(円低)를 계속 용인함으로써 반작용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기업의 수익은 늘어났다고 하지만 국민은 가난해지고 국력은 쇠퇴를 거듭하는 중이다. 세계 경제에서 일본의 비중은 약화하고 존재감이 갈수록 옅어지고 있다. 엔저로 수입 물가가 오르면서 소비자의 지갑은 더 닫히고 오랜 기간 계속된 디플레이션이 이제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상승)으로 번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크다. 개혁을 외면한 결과가 너무 혹독하다.
한편 또 다른 이웃인 대만을 보면 일본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2022년 한때 대만이 우리를 추월하기도 했지만 작년에는 가까스로 우리가 소폭 앞섰다. 한국·일본·대만이 마치 도토리 키 재기라도 하듯 오십보백보다. 하지만 대만의 올해 경제 성적표가 만만치 않다. 올해 1분기 대만의 성장률이 6.51%로 한국 1.3%·일본 –0.5%를 크게 웃돈다. 이 추세라면 대만의 연간 경제성장률이 3%를 훨씬 넘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대만 경제가 잘나가는 이유는 우선 수출이 계속 호조를 보이고 있고, 무엇보다 AI 인프라 투자가 계속 확대되면서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에 이어 AI가 대만 경제를 떠받치는 원동력이 되면서 50년은 먹고살 준비가 끝났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대만이 앞서 나가는 또 다른 이유는 글로벌공급망 재편 과정의 시류를 잘 타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와 기업, 심지어 국민까지 하나의 팀이 되어 절호의 기회를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AI·반도체 전쟁에서 한국을 멀찌감치 제치고 있다. 미국·일본·대만 3국 간 1등끼리의 동맹(설계·파운드리·패키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이 뒤늦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칩4 동맹’에 발을 들였지만 소외되는 분위기가 역력해 보인다. 우리는 송·배전망 건설 지연을 비롯해 보조금이나 세제 등 이 세 나라와 비교하면 어느 하나도 나은 것이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 대만 경제는 TSMC가 이끈다는 말이 있다. TSMC 덕에 중국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특정 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에 대한 경고음은 현재진행형이다.
일본의 후진과 대만의 부상이 우리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목격되는 현상이다. 또 다른 경쟁자인 중국은 미국의 갖은 압력에도 홀로서기에 절반 이상 성공하고 있다. 반도체 설계와 생산에 이르기까지 자립도를 계속 높여 가고 있다. 장비에서도 노광 부문을 제외하면 국산화가 급진전되면서 레드 테크(Red Tech·중국의 최첨단 기술) 생태계 완성도가 점입가경이다.
한국의 설 자리가 계속 좁아지고 있는 양상이다. 미국·일본·대만·중국의 4극 체제가 굳혀지는 구도를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스럽다. 반도체 AI 스타트업 육성에서도 뒤처지고 있다. 스타트업 3곳 중 2곳이 규제로 인한 어려움을 호소하고 급기야는 해외로 빠져나가서 돈다. 제도·인프라에 더해 혁신 등 모든 분야에서 경쟁국들보다 뒷걸음질이다. 국회가 공전하면서 반도체 지원법은 잠자고 있다.
이렇듯 글로벌경제 지형이나 산업 환경이 급변하고 있고, 반사이익을 확보하려는 무리가 즐비하다. 이웃 국가들이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마치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너무나 태평하고 안일하다. 이미 삼류 이하로 전락한 국회 탓만 하면서 정부마저 손을 놓고 있다.
정권의 지지도가 떨어지면서 임기가 절반 이상 남았는데도 공무원이 움직이지 않는다. 입법부 눈치만 보고 줄 대기에만 급급한 전형적 레임덕의 조짐이 벌써 만연해 있다. 그래도 우리가 이 정도 수준의 국가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의 정치판보다 세상 이치에 민감한 행정부의 ‘늘공(늘 공무원·공무원시험을 거친 직업공무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험난한 글로벌 생존경쟁에서 그나마 살길을 찾으려면 정부라도 정신을 차리고 할 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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