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2월24일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펜실베이니아주 매너 타운십에 있는 밀러즈빌 주택에서 전 국가안보국(NSA)에 근무했던 로버트 스테판 립카(Robert Stephan Lipka·1945년생·당시 50세)를 체포했다. 립카는 32년 전인 1964∼67년 NSA 통신병으로 근무하면서 소련 KGB(국가보안위원회)에 지속적으로 기밀을 제공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19살 때인 1964년 미 육군에 입대했다. 소정의 훈련을 마친 후 통신병으로 메릴랜드주 포트 미드에 위치한 국가안보국(NSA)에 배치되었다. 그는 NSA 중앙통신실에 배치되어 텔레프린터에서 출력된 기밀을 해당 부서에 전달하고 보존 기한이 만료된 기밀문서를 분쇄하는 일을 수행했다. 그러다 보니 직급이 사병임에도 다양한 기밀문서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가 접한 기밀은 주로 대통령실에 보고하는 NSA의 일일 및 주간 보고서·전 세계 미군 이동 상황 통신 사본·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동맹국 간의 통신 등 극비 정보였다.
립카는 1965년 9월 워싱턴 D.C.에 위치한 소련 대사관에 자발적으로 찾아가 자신을 소개하고 기밀을 제공하겠다며 그 대가로 400달러를 요구했다. 기밀을 확인한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은 복권에 당첨된 듯이 환호했다. 이때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3명의 소련 KGB 요원에게 NSA 텔레타입의 기밀문서를 대량으로 출력하여 최고의 정보를 제공했다.
그의 코드 명은 ‘루크’였다. 그는 기밀문서를 자신의 몸에 숨겨서 귀가해 스파이 카메라로 찍어 사본을 ‘데드 드롭’(Dead Drop·사전에 약정된 장소에 은닉하여 찾아가게 하는 전달) 방식으로 전달했다. 그는 정보를 제공할 때마다 500∼1000달러의 돈을 받았고, 그렇게 2년여 동안 조국을 배반하고 받은 돈은 약 2만7000달러였다. 소련 입장에서는 립카 덕분에 ‘저비용 고효율’의 작전으로 미국의 극비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 정도 정보라면 최소 수백만 달러를 지불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립카는 1967년 8월 군에서 제대함에 따라 NSA를 떠났고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로 이사하여 그 지역의 밀러스빌 대학교에 다녔다. 제대할 당시 많은 NSA 기밀문서를 가지고 나왔는데, 그가 체포되었을 때 발견되어 유죄 증거로 활용되었다. 30년이나 지난 립카의 간첩 혐의가 들통난 것은 이혼한 전 부인이 립카의 간첩 혐의에 대해 1993년 FBI에 신고한 때부터이다. 당시 FBI는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장기 수사에 들어갔다.
망명한 전 KGB 간부 올렉 칼루긴이 저술한 ‘제1국(The First Directorate)’(1994)에서 1960년대 중반에 NSA의 젊은 군인이 저지른 간첩 행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KGB가 미국 정보 커뮤니티의 코드 해독과 고도로 민감한 도청을 처리하는 NSA의 젊은 정보원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고 기술하고 있다. FBI는 이 책에 언급된 젊은 정보원이 립카라고 믿고 1993년 5월 ‘가짜 깃발 작전(false flag operation)’에 돌입했다. FBI 요원을 소련대사관의 소련군 정보국(GRU) 요원으로 가장하여 립카에게 접근해 함정 수사를 펼친 것이다. 위장 요원은 립카를 12번이나 접선한 끝에 그가 NSC 근무 때 간첩 활동을 했음을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총 1만 달러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 증거는 1995년 영국 MI6(비밀정보부)로부터 FBI가 받은 립카의 간첩 활동에 대한 제보였다. 영국 MI6이 1992년 영국으로 망명한 전 KGB 기록보관소 책임자 미트로킨(Vasily Nikitich Mitrokhin)이 제공한 자료 중에서 립카의 활동 부분을 확인한 것이었다. 미트로킨(본지 ‘스파이 세계’ 27회 수록)은 1917년부터 1984년까지 67년간 소련 정보기관들이 전개한 비밀공작의 실체를 낱낱이 기록한 ‘미트로킨 아카이브’(The Mitrokhin Archive·1995)를 공개했는데, 여기에는 영국과 미국 등 전 세계에서 암약하는 수백 명의 KGB 요원 명단(암호명)과 기밀 연락처가 수록돼 있었다. 이를 통해 FBI는 립카를 스파이로 특정했다.
그는 체포 당시 실업 상태였는데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는 아내의 급여 외에는 생계 수단이 없었다. 월밍턴 근처의 해리스버그와 델라웨어 공원의 경마장에서 말에 베팅하며 소일하고 있었다.
립카는 처음 반역죄를 저지른 지 32년 만에 검거되어 마침내 재판을 받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간첩 사건에 공소시효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재판에서 처음에는 간첩 혐의에 대해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했지만 종신형을 면하기 위해 형량 조정에 임하여 1997년 5월23일 간첩 혐의 1건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고 1997년 9월24일 징역 18년과 1만 달러의 벌금과 1만 달러의 배상금 지불을 선고받았다. 그는 형기의 절반을 복역하고 2006년에 풀려났고, 2013년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고 미·소 핵 대치가 첨예했던 시절, 립카의 정보 제공으로 소련은 당시 미국 정부의 최고 기밀에 접근해 공세적인 대미(對美)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 또한 베트남 전쟁에서 수많은 미군 장병들이 전사하는 데 립카의 반역행위가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기소장에서 연방 검찰은 립카의 혐의가 오래전 냉전 시절의 일이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적을 대신하여 행해진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그가 미국의 국가안보에 입힌 피해를 줄이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립카의 반역 활동은 전 FBI 특수요원인 존 W. 화이트사이드가 저술한 ‘바보의 친구: 국가안보국의 스파이 실화(Fool's Mate: A True Story of Espionage at the National Security Agency)’(2014)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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