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저씨, 아저씨한테는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나는 그때 죽어야 했어요.”
유리는 그때 결연한 눈빛으로 나를 마주 보았었다. 그리고 오늘 새벽, 그녀는 마침내 길을 찾았다. 다시는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서, 다시는 하찮아지지 않기 위해서, 그보다 더 깊은 절망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모르는 어린 소녀는, 그것을 이기고도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는 걸 모르는 스물한 살 유리는 마지막 스포트라이트, 마지막 런웨이를 절대 놓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것이 유리가 죽음으로 불멸의 이름을 얻은 모델 코슈노바와 하나가 되는 유일한 길이었다. 불빛을 찾아 뛰어드는 나방처럼, 멀리서 반짝이는 전조등의 불빛을 붙잡기 위해 그녀가 벤치에서 단호히 일어섰다.
열차가 곧 터널을 빠져나와 플랫폼으로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나는 가슴속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코트 왼쪽 안주머니에 잘 넣어 온 칼의 나무 손잡이가 손아귀에 꼭 맞게 잡혔다. 열차가 승강장에 진입한 순간 그녀의 몸은 선로 쪽으로 향했다.
“유리 양!”
나는 다가가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열려 있는 스크린도어 가까이 다가서던 유리가 멈칫,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놀라서 크게 확대되었다. 그녀가 무엇을 할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내가 무엇을 하기 위해 그곳에 있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유리는 승강장에 진입하고 있는 열차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며 입꼬리를 올려 살짝, 내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선로를 향해 뛰어내리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유리의 몸속으로 뛰어든 투명 인간처럼, 날렵하게 그녀를 낚아채 승강장 노란 선 안쪽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아악, 그녀가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나는 그녀의 몸을 타고 앉았다. 그리고 힘껏,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유리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유리야!”
뒤늦게 상황을 알고 영웅 씨가 허겁지겁, 기우뚱거리며 달려왔다. 나는 유리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일어났다. 영웅 씨와 눈이 마주쳤다. 겁에 질린 영웅 씨의 손에서 콜라 캔이 떨어져 바닥에 굴렀다. 영웅 씨의 발에 챈 다음 허공을 날던 캔은 달려오던 열차에 부딪혔고 바퀴에 짓눌려 터져 버렸다. 나는 항복하듯 두 손을 넓게 들어 올렸다. 손에 쥐고 있던 칼이 유리 옆에 툭 떨어졌다.
나는 뛰었다. 마주 오던 영웅 씨를 밀치고 재빠르게 서너 계단씩 뛰어올랐다. 열차는 문을 열기 전이었고 몇몇 사람들과 부딪힐 뻔했지만 어머나, 하고 놀란 사람들이 먼저 피했다. 기관사와 승객들이, 승강장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열차를 기다리던 사람들 한두 명이 상황을 알아차렸을 때, 그들이 유리에게 우르르 몰려들고, 누군가는 다급하게 소리치고 구급대와 경찰에 전화하는 사이, 너무 깊어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지하를 벗어나기 위해 나는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를 단숨에 뛰어올랐다.
‘무엇을 사랑하며 살 것인가.’
하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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