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빌라왕’ ‘건축왕’ 등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전세사기 범죄가 증가하면서 정부가 태스크포스(TF)팀을 가동하는 등 본격 칼을 빼 들었다.
고금리 여파에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임대인까지 늘어나면서 2023년은 ‘전세사기와의 전쟁’의 해가 될 전망이다.
그러나 정작 관련 법·제도 개정은 갈 길이 멀다. 최근 부활한 등록임대사업자 제도와 맞물려 향후 전세보증금 미반환 사고가 더 증가할 가능성도 제기되는 상황에서 제2·제3의 빌라왕 사태를 막기 위한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더욱 빨리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무자본 갭투기’ ‘조직범죄’에 우는 전세사기 피해자들
수도권에서 빌라와 오피스텔 1139채를 매입해 전세사기 행각을 벌이다 사망한 ‘빌라왕’ 김모 씨는 자금력 없이 전세를 준 돈으로 집을 사는 ‘무자본 갭투기’의 전형적인 사례다.
부동산 호황기에 높여 받은 전세금을 집값 하락기에 돌려줄 수 없게 되어 연쇄적으로 대규모 채무가 발생했다. 종합부동산세 62억여 원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 김씨로 인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1139세대의 피해 규모는 1000억 원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김씨 소유 주택 세입자 가운데 전세금반환 보증보험 가입자는 614명, 미가입자는 525명이다. 보증보험 가입자들은 시간이 다소 소요되더라도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등의 대위변제를 통해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지만 미가입자들은 우선순위를 보장받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또 생전 김씨는 임대인인 자신의 임대 보증보험 가입이 의무라고 세입자에게 고지했지만, 정작 실제 자신이 가입한 임대 보증보험은 44건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씨와 유사한 방식으로 인천 미추홀구 등지에서 빌라와 오피스텔 수십 채를 보유해온 20대 송모 씨 또한 최근 사망하면서 세입자들이 보증금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송씨 보유 주택 중 보증보험에 가입된 주택은 46채로, 임차인들이 돌려받아야 할 총 금액은 57억5000만 원 수준이다. 이 역시 HUG로부터 대위변제를 통해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절차와 시간이 필요하다.
집주인 명의만 가진 이른바 ‘바지사장’을 앞세운 조직범죄도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건축왕’으로 불리는 A씨는 수도권 일대에서 지인의 명의를 대여해 아파트나 빌라를 짓고, 전세보증금과 주택담보대출을 합쳐 주택 총 2700채를 차명 보유하며 일부 세대에서 보증금도 가로채 왔다.
A씨는 바지사장 격인 집주인으로부터 명의를 빌리고 금품을 제공한 뒤, 집주인 뒤에 숨어 신상을 가린 채 똑같은 수법으로 건물을 늘려 갔다.
여기에 가담한 공인중개사나 부동산 컨설팅업체 직원은 대출이자 지원금 등으로 전세계약을 유도하고 차익을 챙겼고, A씨의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음을 알면서도 집주인이 돈이 많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임차인을 속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은 A씨 등 5명의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공인중개사 등 공범 46명을 불구속 입건해 조사 중이다.
이러한 대규모 전세사기 범죄가 증가하자 정부는 본격적으로 대응에 나섰다.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12월30일부터 전세사기 대응 전담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해 운영한다고 밝혔다. TF팀은 HUG의 피해 임차인 전문 상담인력을 늘리고 보증금 반환 절차 및 상황별 대응요령 등 피해 임차인이 구체적인 안내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은 시도지사 협의회 회장단과 간담회를 열고 전세사기 피해 임차인에 대한 빈틈없는 지원을 위해 ‘권역별 전세피해 지원센터’ 설치를 요청했다.
여기에 국회는 국세징수법 개정안 등을 처리해 올해부터 임차인이 집주인 동의 없이 집주인의 국세 체납액을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빌라왕’ 사건에서 임차인들이 김씨의 체납 내역을 확인했다면 전세계약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비판에 따른 후속 조치다.
특히 최근 부동산시장 침체로 매매·전세 시세가 평균적으로 크게 떨어짐에 따라 김씨, 송씨 등과 같은 보증금 피해 사례는 향후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실제로 HUG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보증사고 규모는 2021년 5790억 원에서 2022년 1조 원을 넘기며 2배 가까이 증가했고, 작년 11월 기준 전국 오피스텔의 전세가율(매매가격 대비 전세가격 비율)은 84.92%로 2020년 7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세사기와의 전쟁 선포했지만… 관련 법·제도 시행은 요원
이처럼 전세 시장 상황이 심각하지만 전세사기 피해 예방 관련 법안들은 국회서 잠자고 있어 여전히 갈 길은 멀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은 2021년 9월 HUG가 대위변제한 보증금을 장기간 갚지 않은 이른바 ‘나쁜 임대인’의 인적 사항을 공개하는 주택도시기금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현행 개인자산 및 신용정보 보호법에 따라 ‘나쁜 임대인’에 대한 명단을 임의로 공개할 수 없고, 이로 인해 세입자가 상습적인 전세사기 임대인인지 알 수 없어 피해가 가중된다는 지적에 따른 대책이었다.
그러나 해당 법안은 작년 9월 1차 심의 후 추가 검토를 끝으로 국회서 통과가 보류되고 있다. HUG 관계자는 “나쁜 임대인 명단 공개는 임차인 보호를 위해 필요한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 될 수 있기에 빠른 시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입신고 후 확정일자를 받아야만 제3자 대항력이 생기는 점을 악용한 사례를 방지하는 법안도 최근에서야 발의된 만큼 언제 시행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김회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작년 12월8일 대표 발의한 ‘주택임대차보호법’ ‘민간임대주택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은 전입신고 즉시 대항력을 갖추고 임대차계약증서에 확정일자를 받으면 임대차 보증금채권에 대한 임차인 우선변제권을 인정하도록 했다.
이는 현행 전입신고 후 확정일자를 받아야(다음날 0시) 대항력이 생겨, 그 사이 임대인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임차인의 전세보증금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 후순위로 밀리는 사례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동안에는 관련 특약을 설정하라는 임시 조치만이 민간 시장에서 알려져 왔는데, 이마저도 계약 과정에서 사실상 ‘을’의 입장에 있는 임차인이 요구하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었다.
또, 법적으로 전세보증보험의 근거를 마련하는 걸음마 절차도 최근에서야 마련됐다. 제도적 허점을 모두가 인지하지 못해온 것이다.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12월19일 HUG의 업무에 전세보증보험을 명시하는 ‘주택도시기금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현행 주택도시기금법에는 HUG 업무로 △주택도시기금 운용과 관리 △분양보증·임대보증금보증·하자보수보증·유동화증권 보증 등을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에 전세보증보험을 추가 명시함으로써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자는 취지다.
아울러, 김학용 국민의힘 의원이 앞서 지난해 11월 대표 발의한 ‘주택임대차보호법’ 일부 개정안이 만약 통과돼 임대인이 주택을 매매할 시 지체 없이 그 사실을 임차인에게 통지하도록 규제가 마련됐다면, 최근 ‘빌라왕’ ‘건축왕’ 사례에서 나타난 명의 변경에 따른 무고한 임차인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학용 의원은 “임차주택의 양수인(임차인)은 임대인의 지위를 승계한 것으로 보고 이를 원하지 않을 경우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데, 현행법상 매매계약의 당사자가 아닌 임차인은 그 사실을 알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며 “(제도 허점을 악용한) 전세사기 피해자가 대부분 20~30대 사회초년생들이기에, 개정안 통과로 다시는 전세사기 범죄자들 때문에 청년들의 생활 터전이 파괴되고 꿈이 꺾이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시장 연착륙을 위해 등록임대사업자 제도를 부활시켰지만 전세사기 피해가 급증하는 현 상황에서 방지책을 먼저 마련해놓지 못한다면 향후 피해가 더 늘어날 수 있다”며 “일정 수 이상 주택을 가진 사람을 사업자로 의무 등록하거나, 세금 체납 상황을 등기부등본에 등기하는 등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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