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역연기자를 희망하는 지원자가 늘었어요. 자연히 활동영역도 폭넓어졌죠. 중·고등학생은 물론이고 한 두 살 된 갓난아기까지 있을 정도에요. 하지만 열악한 환경은 여전해요. 장시간 이어지는 촬영 탓에 아이들의 수면·학습권은 보장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죠. 설명하기 힘든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을 촬영할 때 이들에 대한 심리치료 등의 보호 장치도 마련돼 있지 않죠”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이하·한연노)은 1988년 설립됐다. 방송사·제작사·영화사 등 대중문화예술산업 내 막강 권력층의 횡포에 대항하고 방송에 출연하는 대중문화예술인의 활동·복리를 보장하기 위해 결성됐다. 현재 조합원 수만 5000여명에 이르는 방송·대중예술계 최대 노동조합으로 성장했다.
한연노는 방송촬영·방영·편성시간 간 차이를 이용해 관습적으로 부당하게 지급돼 온 출연료 문제를 바로잡은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KBS ‘개그콘서트’다. 90~100분가량 방영되는 데 반해 출연자들에게는 60분에 대해서만 출연료가 관행적으로 지급됐다. 촬영분이 편집될 경우 절반의 출연료만 연기자에 지급됐다.
한연노는 집회 등을 통해 꾸준히 해당 문제에 대해 연기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개그콘서트 출연자들은 2012년부터 온전한 출연료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됐다. 이 밖에도 한연노는 매년 조합원들의 건강검진 및 자녀 교육비 등을 지원하는 등 복지 증진에도 힘쓰고 있다.
화려한 브라운관 뒤 계약서 불이행·출연료 미지급 만연…민원 접수·중재 나서
한연노 송창곤(47·남·연극배우) 대외협력국장은 민원을 접수·처리하고 방송사·제작사 등과 연기자 사이의 협상을 돕는 일을 주 업무로 삼고 있다. 그는 방송·제작사 간 이해관계 탓에 엄연히 고시된 표준출연계약서 등이 무시되기 일쑤라고 꼬집었다.
‘표준출연계약서’는 지난 2013년 7월 문화체육관광부(이하·문체부)가 방송사·제작사·연기자·매니지먼트사 등을 대상으로 마련했다. 하지만 의무가 아닌 권고사항이라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빈번한 게 현실이다.
“표준출연계약서에 따르면 1일 최대 촬영시간은 18시간 이내여야 해요. 18시간씩 3일 연속 촬영하는 것도 불가능하죠. 하지만 촬영 회차가 늘어날수록 막대한 제작비가 드는 탓에 한 번에 며칠 씩 몰아서 촬영하는 것이 현실이에요. 오전 4시에 해산하고 오전 5시부터 촬영하는 건 예삿일이죠. 자연히 잠이 부족하고 집중력이 흐트러지다보니 실수가 잦아지고 때론 큰 부상으로 연결되기도 하죠”
송 국장은 촬영현장에서 아역연기자를 포함한 연기자 뿐 아니라 스태프까지도 열악한 노동환경에 내몰려 있다고 피력했다. 특히 아역출연자들의 권익보호 등을 담은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점은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강조했다.
주우(47·남·탤런트) 사무국장은 각 지부들의 활동영역별 업무환경을 개선·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주 국장은 ‘쪽대본’ 문제가 무리한 스케줄을 유발한다고 지적했다. ‘쪽대본’은 전체 회차 분량의 대본이 아닌 특정 장면만 기재된 대본이다. 현장에서 배우에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 표준출연계약서에 따르면 최소 촬영 이틀 전 대본이 배우에 지급되는 것이 원칙이다.
“사전제작해서 성공한 드라마가 거의 없어요. 시청자와의 피드백이 이뤄지지 않으면 시청률 보장이 힘들기 때문에 제작사 측에서는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죠. 게다가 사전제작은 촬영 후 내용 수정이 필요하면 재촬영을 해야 하니까 제작비가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드라마가 바로 찍어 방송하는 식으로 촬영되죠. 현장은 더욱 바빠지는 셈이죠”
‘가해·피해 행위’ 인식 심어주는 사전예방 중요…“보호장치 존재 알려나갈 것”
“현행 표준출연계약서는 방송·제작사 측과 연기자 간에 서로의 편의를 고려해 타협·제작됐어요. 제작사의 제작비와 연기자의 업무 강도 등을 조율한 최소한의 약속인거죠. 아직까지 계약서에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는 다 담기지 않았어요. 그런데 있는 조항마저도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죠. 한노연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해당 계약서를 강제로 이행하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죠”
한연노 관계자들은 이 같은 부당한 처우에도 쉽사리 문제제기를 못하는 까닭은 업계가 좁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소위 ‘찍히면 바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인식이 팽배한 만큼 방송사·제작사 등 캐스팅의 주체가 되는 이들의 힘이 크다는 의미다. 그래서 한연노는 철저히 익명으로 민원·신고를 접수받고 있다.
“연기자들은 선택받는 입장이에요. 연기력 등의 실력보다 방송·제작사의 선택이 중요하기 때문에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가 을(乙)일 수밖에 없는 구조죠. 저희는 1차로 피해자가 당한 문제 해결에 나서죠. 업계 특성 상 가해자의 보복 등의 추가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도 2차로 주력하고 있어요. 부디 피해를 받은 연기자들이 있다면 두렵겠지만 한연노를 믿고 신고해주길 바라요”
한연노의 숙제는 이렇게 연기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가 존재함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대개 연기자들은 일찌감치 조합을 찾기보다 피해를 당하고 나서야 찾아오기 때문이다. 미리 조합에 가입한다면 촬영현장 등에서의 피해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11월부터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호자의 의지로 아역연기자가 되기도 한, 이른바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아역연기자도 보호자의 동의로 조합에 가입할 수 있게 됐다. 향후 한연노는 표준출연계약서의 강제 이행과 미성년자 연기자의 학습·수면권에 관한 세부 조항 마련 등에 대해 문화체육관광부 등 관련 부처와 의논해 나갈 계획이다.
“그릇된 관행을 이유로 ‘업계가 원래 그래’ 이 말로 모든 게 묵인돼선 안돼요. 권력자이자 가해자에게는 이러한 행동이 위협적이고 가해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인식시켜야 하죠. 피해자에게는 이러한 행위는 잘못된 것이 맞으니 거부해도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시켜야 하고요. 대중문화예술계의 만연해 있는 악습에 대한 전반적 인식을 바꿔나가는 것이 각종 피해를 막는 최선의 예방책이죠”
[이슬비 기자 / 시각이 다른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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