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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포커스]-베이비부머 성공시대(中-직업②)

“꿈과 목표, 배움의 의지만 있다면 당신은 언제나 청춘이다”

인생 황혼기에 꽃핀 문화·예술계의 거장들

동양화의 대가로 거듭난 설파 안창수 화백

교편 내려놓고 카메라로 향한 조정행 감독

강주현기자(jhkang@skyedaily.com)

기사입력 2021-03-29 0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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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예술 영역에서 인생 제2막을 시작한 이들의 남다른 ‘성공신화’가 은퇴 이후를 준비하는 베이비부머 세대들에게 귀감을 주고 있다. 사진은 안창수 화백(왼쪽)과 조정행 감독. ⓒ스카이데일리
 
▲ ⓒ스카이데일리
[특별취재팀=임현범 부장|강주현·이창현·윤승준 기자] 인생은 뜻하지 않은 계기로 전환점을 맞이하곤 한다. 전환점은 전혀 다른 인생을 선물해주며 그 선물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내일을 살게 해주는 원동력으로 자리한다. 전환점이 찾아오는 시기를 특정할 순 없지만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찾아오는 시기도 있다. 바로 은퇴 이후다.
 
설파(雪波) 안창수(77) 화백과 조정행(71) 영화감독은 은퇴 후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주인공들이다. 각각 30여년 간 금융계와 교육계에 몸담았던 이들은 은퇴 후 우연한 계기로 문화·예술이라는 영역에 발을 내딛게 됐다. 누군가는 늦은 나이라고 말하는 60대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에 나선 안 화백과 조 감독은 수년 만에 각각의 영역에서 대가로 거듭났다.
 
붓과 먹이 선사한 제2의 인생…대가(大家)가 선사하는 동양화의 ‘극치’
 
설파 안창수 화백의 화실은 경상남도 양산 모처에 위치한다. 안 화백은 거처를 지으며 건물 지붕 위 바로 아래 공간에 따로 화실을 마련했다. 동양화의 대가(大家) 설파 선생은 아늑한 화실에서 여생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다. 자신만의 화풍으로 작품을 그려내고 싶다던 안 화백은 고서(古書)를 스승삼아 지금 이 순간에도 동양화에 정진하고 있다.
 
해방기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안 화백은 은퇴 전 대부분의 시간을 타지에서 보냈다. 학업을 이유로 양산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가야 했고 한국수출입은행에 몸담게 된 이후부턴 줄곧 서울에서 생활했다. 한국수출입은행을 거쳐 2000년대 초 대우조선해양 고문으로 잠깐 일한 후 안 화백은 2004년 즈음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올 당시만 해도 안 화백은 동양화는 물론 그림 자체와도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양산은 우리 가문의 뿌리가 있는 장소에요. 가문의 뿌리를 지키면서 남은 인생을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양산에 내려왔죠. 당시만 해도 그림을 그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유교경전 등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친구의 권유로 서예를 배우게 됐어요. 그 때 처음 붓을 잡아봤죠”
 
▲30여년의 세월 간 몸담았던 금융계를 떠나 노후를 준비하던 안창수 화백(사진)은 우연한 계기로 붓과 인연을 맺고 동양화의 대가로 거듭났다. ⓒ스카이데일리
 
“붓을 잡고 경전을 베껴 쓰다 우연히 닭 그림전을 접한 후 그림을 그리게 됐어요. 제가 닭 띠 인데다 당시 새해가 닭의 해이기도 해서 닭 그림 몇 장을 그려봤죠. 그런데 주위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나도 한 장 그려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반응이 좋았죠. 그 길로 제대로 그림을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에 중국으로 유학길을 떠나게 됐죠”
 
배낭 하나만 메고 중국으로 떠난 안 화백은 미술학교를 찾아 무작정 교수들의 방문을 두들기고 다녔다. 중국어엔 서툴렀지만 수출입은행 재직 시절 익혔던 일어가 도움이 됐다. 일본어를 하는 교수를 만나 추천서를 얻을 수 있었다. 안 화백은 휴대폰에 저장해뒀던 그림을 그 교수에게 보여줬고, 그 교수가 추천서를 써준 덕에 항저우에 있는 중국미술대학에서 그림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
 
환갑의 나이에도 안 화백은 하루 종일 붓을 놓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에 쥐가 날 정도로 밤늦게까지 그림에 몰두했던 노력은 금세 결실로 돌아왔다. 중국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한 지 6개월만에 중국 외국인전국서화대전에서 닭 그림으로 입선한 것이다. 이듬해에는 중국 임백년배 전국서화대전에서 호랑이 그림으로 1등상을 받았다. 중화배 전국서화예술대전에서는 독수리 그림으로 금상을 타기도 했다.
 
“원래는 6개월만 중국에 머물며 공부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대회에서 입상하는 등 성과가 보이니까 신이 나더라고요. 더 열심히 그림을 그리게 됐고 유학시간은 2년으로 늘었죠. 중국에서 공부를 마친 후에는 일본으로 떠났어요. 이왕 시작하게 된 거 한중일 3국의 그림을 모두 익혀야겠다는 생각에서였죠”
 
안 화백은 일본 교토조형예술대학에서 1년 가량 공부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도 다수 대회에서 입상했다. 소화미술회전, 전국수묵화수작전 등에서 입선했고 전일전 준대상도 탔다. 특히 일본수묵화수작전에선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외무대신상을 탔다. 당해 대상 격인 총리대신상 수상자가 없었기에 안 화백이 탄 상은 사실상 최고 수상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수묵화수작전은 권위 있는 일본 최대 수묵화 공모전이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2006년 말 즈음 한국으로 돌아온 안 화백은 수많은 서적을 스승 삼아 그림공부에 더욱 매진했다. 그 결과 현재 그는 라면박스 50개를 채우고도 남을 양의 서적을 보유하고 있다. 안 화백은 개정 유무의 차이일 뿐 보지 않은 동양화 서적이 없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안 화백은 약 2년여 간을 더 공부한 뒤 2009년 서울 인사동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당시 40점 정도의 그림을 전시했는데 전시했던 그림 대부분이 새주인을 찾았다.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찾아왔어요. 아마 내가 그림을 그린다는 소식에 어떤 그림을 그리는 지 궁금해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거에요. 반응이 좋았고 전시했던 그림은 거의 다 팔렸던 거로 기억해요”
 
안 화백은 일본 유학시절 한 교수로부터 ‘이렇게 5년만 하면 대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당시로부터 10년여가 지난 지금 스스로를 대가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는 “내가 말한 적은 없는데 주위에서 대가라고 해주더라”며 웃음 지어 보였다.
 
현재 안 화백과 여생을 보내고 있는 가족은 아내와 반려견 ‘동별이’다. 동별이와 아침 산책을 하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안 화백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화실에서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의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선택에 후회는 없다는 게 안 화백의 설명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게 될 수 있어 행운이라고 말하며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면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림 공부를 위해 그간 모았던 재산을 꽤나 사용했어요. 누군가는 아깝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내가 이 나이되도록 그 돈을 끌어안고 있어봤자 뭐하겠어요. 오히려 그림을 그리게 될 수 있어 복 받았다고 생각해요. 노년에도 당신(기자)처럼 젊은 사람들과 대화 할 수 있는 것도 그림 덕분 아니겠어요. 남은 인생이 얼마나 될 진 모르겠지만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 한국화 발전에 기여하고 싶어요”
 
“배움엔 끝이 없고 나이엔 정해짐이 없어요. 중국 유학 시절 중국미술대 교수에게 ‘늦은 나이에라도 이렇게 그리면 유명한 화가가 될 수 있소’라고 물은 적이 있는데 그 교수는 가능하다고 했어요. 청나라 양주팔괴(揚州八怪)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서 말이에요. 뭐든지 최선을 다해 임하면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믿어요. 두려워 말고 실행에 옮겨보면 뜻밖의 시간이 선물처럼 다가올 수 있어요.”
 
오랫동안 잠들었던 영화의 꿈…평생 머물던 학교 떠나 촬영현장 누벼
 
▲ 조정행 감독(사진)은 40여년 간 몸담았던 교정을 떠나 오랜 친구였던 영화를 다시 만났다. ⓒ스카이데일리
 
파주시 문발동에 위치한 조정행 감독의 영상작업실. 그곳에 들어가면 벽에 걸린 대형 스크린과 바닥에 놓인 스피커들이 영화의 세계로 인도하듯 서있다. 책장에 놓인 영화 서적과 포스터, 스틸사진 등이 예술적인 자태를 뽐낸다. 조 감독은 이곳에서 영감을 얻고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극영화 ‘방석’(2016)과 다큐멘터리영화 ‘나의 아버지 히로타’(2018)에 이은 세 번째 작품도 이곳에서 준비하는 중이다.
 
학창시절 조 감독은 ‘영화광’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본 영화 ‘슬픔은 그대 가슴에’는 그에게 엄청난 감동과 충격을 안겨줬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엔 일상의 탈출구로 영화를 찾았다. 당시 극장에서 외국영화를 140편 가까이 볼 정도였다. 그의 눈에 비친 영화 속 세상은 마치 새로운 문명과도 같았다. 그때 본 영화들은 향후 감독을 하는데 있어 큰 자산이 됐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꿈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현실 속에서 파묻혔다. 대학 진학 후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교직생활을 이어가며 잊고 살았다. 37년 동안 영화와 담을 쌓고 교직에 몸담았다. 그러다가 2014년 고양시 장성중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을 1년 앞당겨 퇴직했다. 아무런 꿈도 없이 살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퇴직 후 그는 동네에 있는 교하도서관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40년 만에 오래 전 친구인 영화를 다시 만났다.
 
“2012년 3월 교정을 떠날 때 해방감과 행복감에 눈물이 났어요. 이후 몇 달 동안 운동만 하면서 놀았죠. 그러다가 7월 쯤 에어컨만 틀고 집에 있기 아까워서 도서관을 다녔어요. 그때 ‘죽기 전에 봐야할 500편의 영화’라는 책을 발견했죠. 책을 읽어 보니까 다 중고등학교 때 본 영화였어요. 갑자기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가 ‘꿈이 있던 시대로 돌아가라’라고 했던 말이 떠오르더군요. 내 가슴 속에 있던 영화에 대한 꿈을 다시 끄집어내는 순간이었어요.”
 
도서관에서 영화 서적을 읽던 중 주변 지인이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촬영기법을 배워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상 제작과 시나리오 작성을 배워보고 싶었다. 곧장 고양영상미디어센터로 향했다. 그곳에서 영화 이론부터 사진 촬영, 동영상 편집 등 영화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 수업이었던 시나리오 작법 시간은 영화판에 발을 들이기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영화 ‘마파도’를 각색한 김진수 선생님이 시나리오 작법을 가르쳤어요. 한 번은 시놉시스를 써서 제출하라는 숙제를 내줬죠. 제가 국어교육과를 나와 국어교사를 했지만 글을 제대로 써본 적 없어요. 며칠 동안 글을 못 썼죠. 그러던 중 선생님이 ‘자기가 살아오면서 제일 인상 깊었던 얘기를 쓰라’고 하더군요. 고민하다가 예전 대학교 다닐 때 열렬하게 연애했던 동창들이 생각났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담으면 좋을 것 같더라고요.”
 
반응은 좋았다. 김진수 작가 등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영화로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6세였다. 40년 가까이 교편을 잡아 영화라는 분야가 생소했지만 열정 하나로 부딪혔다. 물론 현장경험이 전무해 무시도 받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전직 교장선생님이라는 ‘계급장’을 떼고 하나씩 배워갔다. 고생은 성공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2016년 노인영화제에서 조 감독이 연출한 영화 ‘방석’은 장려상을 수상했다.
 
“2015년부터 영화 ‘방석’을 제작하기 시작했어요. 상영까지 1년 정도 걸렸죠. 캐스팅부터 연출, 음향, 미술, 음악부 등을 꾸리고 80년대 분위기를 자아내는 장소도 직접 섭외했죠. 현장경험이 없어서 무지 어려웠어요. 체력도 부족했죠. 열흘 연속 촬영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졸면서 운전할 정도였어요.”
 
영화에 대한 열정은 찰나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다큐멘터리에 도전했다. 기구한 일생을 살았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야기로 그 세대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담고 싶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엔 불령선인, 해방 이후에는 좌익사범으로 옥고를 치르며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인물이었다. 대구형무소, 오사카형무소 등을 이동하며 자료를 수집했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아버지가 태어나신지 100년 맞는 해여서 기념으로 영화를 선물하고 싶었다.
 
조 감독은 인생의 2막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세상에 당당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젊은 사람보다 능력이 떨어진다고 주눅 들어서 안 된다는 의미였다. 또한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야한다고도 전했다. 단순히 집에서 TV를 시청하고 쇼핑이나 여행을 다니는 것에 그치지 말고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자신을 낮게 평가해선 안 돼요. 누구나 재능은 있거든요. 곰곰이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은 없어요. 좋아하는 걸 하면 우울하거나 허무한 감정은 느낄 겨를도 없고요. 저 역시 학창시절 때 좋아하던 영화가 40년 간 바닥에 깔려 있다가 60대에 들어서 떠오른 것이에요. 새로운 분야에 두려워하지 마세요. 도전하다보면 도와주는 사람이 주변에 생겨요.”
 
“영화 ‘닥터 지바고’처럼 역사 현장에서 잊히고 이름 없는 사람들의 얘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요. 치열한 전투 속에서 기가 막힌 사랑을 나눈 사람들의 얘기죠. 더불어 세상 한 구석에서 누군가 혼자 울컥하는 영화 한 편을 만들고 싶어요. 한 사람의 가슴을 쳤으니 얼마나 값어치 있는 인생인가요. 유명하지 않아도 가슴을 울컥하는 작품을 만드는 게 목표에요.”
 
[강주현 기자 / 시각이 다른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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