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 최대 현안인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 문제 해결 방안과 관련해 양국이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일본 기업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배상하는 방안이 유력시되고 있다. 최근 북한의 이어지는 군사도발로 한·미·일 3국의 해군이 동해에서 합동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사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가운데, 문재인정부에서의 대일 경색 국면이 윤 정부 취임 5개월 만에 본격적인 해빙무드를 맞고 있다.
‘재단’ 통해 일본 기업 기부금 배상 …‘병존적 채무인수’에 주목
조현 외교부 1차관과 모리 다케오(森健良)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은 25일 일본 도쿄에서 90분간 양자 회담을 열었다. 이들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따른 대처 방안을 비롯한 현안을 논의했는데, 회담에서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 문제도 비중 있게 다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일본 유력지인 아사히는 25일 복수의 한국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한국 정부가 애초에 (일본 기업의) 배상을 대신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여론이 강하게 반발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해 한국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기부금을 모아 배상을 대신하는 방향으로 생각이 굳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서 “한국 측은 그동안 외교 당국 간 협의에서 옛 징용공(강제노역 피해자)의 동의를 얻기 위해 배상 이행을 거부하는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에도 일정한 부담이 필요하다고 전달했으며 양사가 배상액과 같은 금액을 ‘기부’ 등의 명목으로 거출하는 안을 물밑에서 타진했다”고 전했다.
아사히는 ‘한일청구권협정’에도 반하지 않음을 강조하며 “재단 출연에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일본의 경제협력금을 사용해 성장한 한국 기업이 포함돼 있어 한국 정부는 징용공에 대한 구제의 취지에 부합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우리 정부가 해당 재단을 활용해 ‘병존적 채무인수’ 방식으로 강제동원 배상 문제를 푸는 방안을 일본 측에 우선순위로 전달했다는 것이다. 병존적 채무인수는 채무자의 채무는 그대로 존재하되 다른 3자가 새롭게 동일한 채무를 인수하는 방안이다. 대위변제와는 달리, 채권자(피해자)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에서 유력한 방안으로 떠올랐다.
윤덕민 주일 한국대사도 9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해당 재단을 활용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주는 방안이 정부 내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정부 관계자도 언론에 “일본 측도 이 방안에 대해 큰 거부감은 표시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 관계자도 “일본으로서는 용인 가능한 방안”이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우리 정부는 강제동원 배상문제 해결 방안 마련을 위해 정부 예산 투입 대신 한일 양국 기업 등 민간 차원의 재원 조성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는 방안도 검토해왔다. 이와 함께 실행할 주체로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기보다 이미 설립된 재단을 활용하는 방식에 집중해왔다.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행정안전부 산하에 있는데, 일제 강제동원 피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복지를 지원하기 위해 한국 정부와 기업이 참여해 2014년 설립했다. 25일 제5대 신임 이사장으로 심규선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취임했다.
다만, 한국 외교당국은 아사히의 보도 내용에 대해 특정 방안을 놓고 협의 중인 것은 아니며, 아무것도 결정된 바 없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외교부 당국자는 아사히의 징용 관련 보도에 대해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다. 이는 피해자 측의 강한 반발을 우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한 외교부 당국자 또한 “정부는 그간 민관협의회에서 논의된 사항들과 직접 피해자분들로부터 경청한 목소리 등 그간 수렴한 피해자 측 입장을 일본에 전달하고 성의 있는 호응을 촉구해왔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당국자는 이어 “앞으로도 우리 정부는 그간 국내적으로 수렴한 대법원판결 이행 관련 다양한 의견을 충분히 고려해 합리적인 해결방안을 검토해 나갈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도 24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의 종합감사에서 일제 강제동원 배상 문제 협의와 관련해 “일본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한·일간 지속적으로 합리적 해결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소통 중”이라고만 밝혔다. 이어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고 피해자들도 전부 동의할 수 있게 해결 방안을 마련하겠다”며 말을 아꼈다.
앞서도 한·일관계 최대 현안인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배상 문제 해법을 모색하기 위한 ‘민관협의회’가 7월 공식 출범했으며, 정부 인사, 전문가, 피해자 측 관계자들이 참여해 배상문제 해법 도출을 주도했으나 해법 모색 없이 종결되고 말았다. 법원은 2018년 10월과 11월 각각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내용의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그럼에도 피고인 일본 기업들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 모든 배상 문제가 끝났다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며 판결을 수용하지 않았고, 피해자들은 해당 기업들의 국내 자산을 매각해 현금화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이에 강제집행을 개시하는 사법부 최종 결정이 이뤄질 경우 한·일 관계에 회복 불가능한 경색 국면이 예상됐던 만큼 해결안 도모를 위해 민관협의회가 발족됐다.
해결 방식으로는 △일본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할 돈을 한국 정부가 먼저 지급하고 나중에 일본 측에 청구하는 이른바 ‘대위변제’ 방안 △한국과 일본 기업이 자발적으로 조성한 기금으로 피해자에게 위자료 형식으로 지급하는 ‘1+1안’ △기금 조성에 양국 기업은 물론 국민성금을 더하는 ‘1+1+α(문희상안)’ 등이 거론됐다. 가장 큰 주목을 받은 ‘대위변제안’의 경우 피해자 측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외교부가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한 것을 계기로 피해자측이 세 번째 회의부터 불참을 선언하면서 반쪽 회의로 전락했다.
지난달 6일 운영이 종료된 민관협의회는 결론 없이 마무리됐는데 당시 외교부 관계자는 “공개로 참석자를 제한하는 형태의 협의회는 더 이상 개최하지 않을 수 있으나 보다 외연을 확장한 형태의 모임을 검토할 것”이라며 “그 외 다양한 방식으로 피해자 측과 지원단체 그리고 전문가들과의 소통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5일) 열린 마지막 회의에서는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금을 제 3자가 대신 지급하는 대위변제나 병존적 채무 인수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제 3자의 지급은 일본 측이 피고 기업 자산의 강제적 현금화에 반발하고 있으며 피해자들이 가해 기업의 사죄를 요구하는 가운데 정부가 상황을 관리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됐다. 참석자들도 대위변제보다 새로운 기금, 재단을 만들거나 기존 재단을 활용해 변제하는 방안을 비중 있게 논의했다.
‘결론’ 없던 민관협의회 …‘병존적 채무인수’도 피해자 설득이 관건
병존적 채무인수 방안 또한 피해자 측의 반발이 예상된다. 민관협의회에 직접 참석했던 대한변협 일제피해자인권특위 부위원장인 박래형 변호사는 25일 국회에서 양정숙 의원 주최로 열린 ‘일제 피해자 문제 제대로 해결하자’ 간담회에서 “판례상 피해자인 채권자의 승낙이 없다면, 제3자가 변제를 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채무자와 제3자와의 계약에 의하여 당사자 간에는 유효한 계약이 성립한다고 하더라도, 채무자와 제3자와의 계약은 채권의 효력밖에 없다고 할 것이므로, 원 채권자에게 효력이 미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박 변호사는 “피고 기업이 판결을 받아들여 직접 변제를 하던지, 직접 변제를 하지 않는다면 원고들이 요구하는 사과와 그에 따른 보상이 없는 이상 강제 집행을 면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주장했다. 병존적 채무인수 방식의 배상에서도 결국 피해자인 채권자의 동의가 필요할 경우 배상 방식에 따른 피해자의 설득 절차에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간담회에서는 대안으로 양정숙 의원이 2020년에 발의한 '일제 강제동원 및 위안부 피해자 인권재단 설립에 관한 법률'이 언급됐다. 강제동원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기 위한 재단을 설립하는 것이 주요 내용인데, '기부금'이 아닌 일본 정부와 기업이 손해배상의 취지로 신탁한 '신탁금'에서 지급되도록 한 것이 차이다.
실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최봉태 변호사는 이에 대해 “기존 재단은 일본 기업과 정부가 자금을 출연해도 결국 법적으로 효과가 없다”며 “새로운 재단의 경우, 일본 기업이 돈을 내도 다 받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로 내는지 적정성을 심사해 결정할 수 있고, 일본에서도 한국에서의 모든 법적 리스크는 사라진다”고 강조했다.
한편으로 문재인정부에서 해방 이래 최악이라 평가 받던 한·일 관계는 개선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한·미·일 안보협력과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거듭 주장해왔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6일 25분간의 전화통화에서 한·미·일 3자간 안보협력과 국제사회 연대를 통한 북한도발에 대한 합동 대응을 강조했다.
한·미·일 3국 해군도 지난달 30일 미 항모전단 전개 때 한미일 3자 대잠수함전 훈련을 한 데 이어 이달 6일에는 3국이 해상 미사일 방어훈련을 벌이며 계속되는 북한 도발에 강경 대응을 하고 있다. 이와 함께 다음 달부터 아세안 정상회의·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등이 국제회의가 잇달아 열리면서 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공식적인 첫 정상회담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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