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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언의 문화방담] 지·필·묵·채의 유미주의자 오용길, 현대를 품다
치유의 마법을 지닌 ‘봄 풍경’의 시그니처로 팬덤
‘풍경 한국화’로 현대 한국화의 새로운 지평 활짝
이재언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6-23 06:31:00
 
▲ 이재언 미술평론가
조선시대의 회화는 겸재 정선의 전과 후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겸재에 의한 진경산수(眞景山水)의 확립은 그만큼 중요한 미술사적 의미를 갖는다. 고답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현실 세계와는 동떨어진 미술에서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아울러 정체성과 생명력이 깃든 미술로 나아가는 전환점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진경 혹은 실경은 ‘좋음’이라는 가치 개념으로 통하면서 오늘날 이 개념이 많이 남용되고 있다. ‘진경산수의 계승자’ 혹은 ‘진경의 맥을 잇는 화가’ 등의 수식을 많이 볼 수 있다. 실제 풍경을 그리지 않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것이 혁신적 미술의 의미를 가지기는 한다. 하지만 지금 엄밀히 보았을 때 오늘의 한국화에서 실경을 찾기보다는 비(非)실경의 산수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다. 관념적 혹은 상투적인 과거의 전형적 산수를 찾기란 쉽지 않다. 사실 재현의 범주에서도 대부분의 작가들은 세계의 변화무쌍한 모습들을 어떤 식으로 동시대의 미의식으로 생생하게 담아내느냐의 문제에 더 역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한 것 아닐까.
 
▲ 가을서정-인왕산, 364x122cm, 화선지에 수묵담채, 2012.
 
오용길(76)의 경우는 누구보다 전형성을 가진 한국화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그림을 ‘풍경화’라 부른다. 현대적인 도시풍경을 한국화로 그리면 ‘현대산수화’라 불러야 할까.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말처럼 풍경화라 부르는 게 맞는 것 같다. ‘한국화’라는 구분에도 모호한 데가 많지만, ‘산수’라는 개념과 구분엔 더 많은 모순이 존재하는 듯하다.  풍경화라 하여 한국화가 아닐 수도 없으며, 또 극단적으로 말해서 한국화가 아니면 또 어떤가. 보편적인 미적 가치를 가진 그림이면 되는 것 아닌가. 사실 ‘한국화’라는 구분은 학과나 공모전 같은 데서 유독 강조한다. 전통적 장르를 보호하고 장려한다는 취지에서라면 이해한다. 그러나 이것이 혹시라도 어떤 고립을 고착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우려되기도 한다. 한국화 고유의 재료와 기법·미적 특성 등을 건강하게 살리고 발전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우리 시대와 세계를 작품에 어찌 담아내야 하는가에 대해 소홀할 수는 없다.
 
▲ 크로아티아 스플릿, 102X136cm, 화선지에 수묵담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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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그림은 초기에 수묵을 근간으로 한 데서 출발하여 근작으로 올수록 색의 비중을 높이고 있다. 초기에는 전형적인 산수에서 조심스럽게 운신하여 산수화적 풍경을 많이 그렸다가 근자에는 전형적인 풍경 한국화를 그리고 있다. 특히 2010년대부터 유럽의 풍경들을 많이 그려 발표했는데, 재료가 한국화일 뿐 구도나 색감 등에서 한국화와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스스로 어떤 미학적 변화를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보편적 회화에 대한 의식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국화라는 장르가 때로는 보호장치가 될 수도 있지만, 또 때로는 무언가 중심부로 진입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편견으로 작용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가 장르나 부문의 어드밴티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모든 편견을 불식시키는 데 앞장서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곧 한국화의 질적 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 길이니 말이다.
 
▲ 프로방스, 97x131cm, 한지에 수묵채색, 2019.
 
 
▲ 가을 서정-안동, 92x130cm, 화선지에 수묵채색, 2020.
 
정말이지 참 잘 그린다. 화가에게 잘 그린다는 말이 찬사가 아닌 다른 말로 곡해될 수도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이 말은 물론 필자의 무의식 속에 내재된, 묘사력에 대한 콤플렉스와 부러움 같은 것이 표출된 것일 수도 있다. 남들이 다 받는 학원식 실기 훈련을 받지 못한 독학파로서 데생의 부족함을 극복하지 못한 터라 오용길 작가처럼 묘사력과 운필이 출중한 케이스에 더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말이지 작가는 ‘이런 소재도 훌륭한 그림이 될 수 있구나’라는 감탄을 자아내는 절묘한 비기(祕技)의 소유자이다. 거의 해마다 다수의 초대·개인전을 소화해 내면서 발표한 작품들만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작업을 해내는 에너지도 놀랍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발표하는 전시마다에 참신하고 기발한 아이템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유리가 많아 반사가 심한 도시 빌딩들을 수묵으로 표현한 것들이 좋은 예이다.
 
 
▲ 봄의 기운-산동, 94x170cm, 화선지에 먹과 채색, 2019.
 
▲ 가을 서정-영주, 94x170cm, 화선지에 먹과 채색, 2020.
 
작가의 시그니처는 뭐니 뭐니 해도 봄 풍경이다. 특히 가장 먼저 피는 산수유·매화가 있는 풍경을 필두로 갖가지 봄꽃들로 장식된 봄의 풍경화들은 확고한 팬덤을 지니고 있다. 봄의 아름다움에 취해 갖가지 사진을 찍어 봐도 그 감흥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오용길 작가의 풍경화는 실제 의 풍경 그 자체보다 더 매혹적인 그림이다. 부드러운 여운을 주는 서양적 스푸마토 기법에 필적할 감미롭고도 포근한 분위기의 화면은 가히 마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그림들이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힘겨워 하는 대중에게 치유의 효과를 발휘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유독 현대미술에 대해 지독한 짝사랑에 빠져 있는 완고한 애호가조차도 그의 그림들 앞에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치유와 위로를 본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몸담았던 갤러리에서 여러 차례 초대전시가 있었으며 때마다 그림들이 무섭게 팔려 나가는 현장을 직접 목격한 바를 가감 없이 말한 것이다. 
 
▲ 생폴드방스, 54x65cm, 화선지에 먹과 채색, 2019.
 
2010년대 후반 들어 작가는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 유럽 풍경화들을 많이 그렸다. 한국화 작가가 외국 여행 스케치와 그림으로 인상적인 성과를 거둔 경우로는 천경자를 꼽을 수 있다. 표현주의적인 필치와 강렬한 색상의 화면들이 이국적인 정취를 절묘하게 담아낸 것이다. 이에 비해 오용길의 경우는 강렬한 인상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다양한 이국 풍경들을 지·필·묵·채의 한국화로서 감각적이고 매혹적인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화단에서 비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확실히 작가의 역량은 10대 때부터 잘 다져진 탄탄한 데생과, 한국화를 전공하면서 쌓여 온 내공의 필력과 감각을 기초로 하고 있다. 사진의 도움을 받는 점이 있다 하더라도, 화면에서 전형적인 지필묵채를 사역하여 이루는 성취는 실제 풍경과 사진에서조차 느낄 수 없는 ‘이상화’라는 가치로 귀결될 것이다. 이는 서양 신고전주의의 핵심이지만, 한국화로 구현된 이 가치는 화단에서 회자될 만하다. 작가 역시 서양의 무대에서 공정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평가받고 싶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 오용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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