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06] 단 한 번으로 충분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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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번으로도 부족한 사랑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6-10 06:30:10

“그레고르 잠자는 카프카의 거의 모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권위적이고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주인공이야. 강물에 빠져 죽어 버리라는 아버지의 악담 한 마디에 정말 다리에서 뛰어내린 ‘판결’의 게오르그 벤데만보다는 덜 극단적이지만 말이야. 그레고르 잠자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해 상처받은 작가, 카프카의 분신이야.

셋째, 잠자는 주인공의 이름이 아니야. 주인공 그레고르의 성이지. 그러니까 아버지도 잠자고 아들도 잠자야. 어머니도 잠자 부인이고 동생도 잠자란 말이야. 넌 그레고르뿐 아니라 나머지 잠자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타당한 소설을 써낼 수 있을 만큼 그들의 생각과 입장을 이해하고 변론할 수 있어야 해. 그게 우리 문학반의 이름을 잠자라고 한 이유야.

넷째, 사과에 대한 너의 주장은, 그래도 네가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 놈이구나, 싶어서 유일하게 들어 줄 만했지만, 그건 저 녀석이 먹고 있는 사과를 보고 즉흥적으로 떠올린 임기응변에 불과해. 네가 정말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면, 네가 주목한 사과 역시 아버지와 아들, 개인이 맺는 불안한 인간관계와 연관 지었을 테니까.”

현성은 한 마디도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그 또한 현성의 개인적 해석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하운이 대답했다. 현성은 휭하니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하운은 고개를 푹 꺾고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때 문이 다시 열렸다. 현성의 깨끗한 신발이 먼저 보였다. 운동화 끈이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꼬인 부분 없이 말끔히 매어져 있었다.

“한번 보자.”

현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운이 고개를 들었다. 뭘 보자는 걸까, 하운은 말없이 눈만 깜빡거렸다.

“원고지 80매. 일주일 뒤 이 시간, 여기.”

야호! 함성을 지르며 와락, 하운이 현성을 끌어안았다. 남학생들이 휘익, 손 휘파람을 불었다.

현성이 존재하는 것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그가 숨 쉬고 말하고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하운이 살고 있는 우주는 비로소 충만해졌다. 거기엔 어떤 의문도, 확인도 필요하지 않았다. 세상의 인정이나 물리적인 조건들도 필요하지 않았다.

현성과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친구들이 연애를 시작하면서 사랑을 미화할 때 동조하고 맞장구를 치긴 했지만 진심으로 그들과 같은 걸 동경해 본 적은 없었다. 대신 당돌하게도 하운은 단 하룻밤만 현성과 자고 싶었다. 그래서 현성을 꼭 닮은 아들을 낳고 싶었다. 남자와 자는 게 어떤 건지 몰랐고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때였다. 하운은 현성의 여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하운은 현성이 되고 싶었고 현성, 그를 통째로 삼키고 싶었으며 마침내 자신의 몸으로 온전히 그를 낳고 싶었다.

“날 사랑한다고 말해!”

동우의 고함이 하운을 오래전 기억에서 불러냈다. 눈앞에 있는 동우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말하면, 믿을래?”

하운이 물었다. 동우가 순진한 아이처럼 머리를 끄덕였다. 하운은 이제 모든 걸 끝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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