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국내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느라 바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규나 작가가 한강 작가의 수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 글을 두고 각 언론사는 물론 일반인도 집단 폭력에 가까운 비판을 쏟아붓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본지 지면과 온라인에 연재 중인 김규나 소설 ‘최초의 당신’에도 인신공격성 댓글이 난무하고 있다. 대체 왜, 그들은 뭐가 두려운 걸까. 김규나 작가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들의 지나치리만치 예민한 반응에 어떤 생각이 드나요
수년째 일간지와 경제 전문 잡지에 시사 칼럼·영화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지만 이처럼 세간의 관심을 요란하게 받은 적이 없다. 정치 문제든 사회 문제든 개인 소셜 미디어에 가감 없이 생각을 올리는 것에 부담을 느껴 본 적도 없고 이슈가 된 적도 없다.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련해서 개인 소셜 미디어에 올린 글이 여러 지면과 TV 뉴스에 보도되어 조롱과 비판을 당했다. 인용해도 되겠느냐며 형식을 갖춰 의뢰한 언론사와 기자는 없었다. 개인 방에 구둣발로 들어와서는 마음대로 물건을 훔쳐 가듯, 내 글을 박제하고 천박하게 제목을 달고 ‘감히 노벨상 받으신 한강 님을 비판한’ 김규나에게 달려가 돌을 던지라며 선동하고 있다.
궁금했다. 대체 왜 내 글을 그토록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대중을 광분시키는 것일까? 사실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이 공유된 탓이다. 너무 많이 알려져서 일반대중과 독자들을 깨운 탓이다.
“어머나, 한국 작가가 노벨상 탔대!” 하고 축하하고 기뻐하는 분들께 작가와 그 작품의 실체를 알려 버린 것이 내 죄다. 노벨문학상을 기점으로 5·18과 제주 4.3 미화를 완성하려 했는데 다이너마이트를 던진 셈이랄까. 그러니 메시지를 부정하기보다는 “마녀가 나타났다, 꼴에 작가란다” 하며 메신저를 욕보이는 게 쉽고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익명의 네티즌들이 기사 아래 댓글에 반말로, 욕설로, 상스러운 인격 모욕을 당당히 표현하고 있다는 건 당혹스러우면서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하나의 돌을 던진 사람에게 수많은 사람이 일제히 돌팔매질하는 셈이다. 공정하지 않다. 누구나 평등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사회다.
그런데 “나는 너를 비판해도 되지만, 너는 누구도 비판해선 안 돼”라며 입을 막는다. 좋아하는 사람을 같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일을 함께 즐거워하지 않으면 자신이 부정당하고 모욕당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자유에도 계급이 있고 차별이 있다. 자유의 양극화랄까. 그래도 어떻게 100퍼센트 국민이 다 같이 한 사람을 추앙하길 바랄 수 있을까. 공산 사회처럼 말이다. 그 모순을 많은 분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부끄럽고 슬프다’고 한 이유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팻 머피의 단편 추리소설 ‘채소 마누라’와 설정이 거의 똑같은 한강의 단편소설 ‘내 여자의 열매’에는 밑도 끝도 없이 “이 나라는 죄다 썩었어!”라는 문장이 나온다. 그 작품만이 아니고 그 작가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문단에 포진하고 있는 작가들 대부분의 작품 속에는 자기들이 발붙이고 사는 이 땅에 대한 악의적인 모욕과 비하가 감춰져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연평균 독서량이 3.9권이다. 1년 동안 네 권도 안 읽는다는 건데 미국과 일본은 한 달에 6권, 1년이면 70권이 넘는 독서량을 자랑한다. 죄송한 말이지만 우리나라 독자들은 책, 특히 소설과 작가를 모른다. 사실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매체가 띄워 주는 작가와 작품에 ‘좋구나! 옳구나!’ 신뢰를 보낼 뿐이다. 그래서 유명 작가와 작품은 작가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출판계·문단 전체가 가진 이념이라는 걸 모른다.
노벨상은 그 어떤 상보다 정치적이다. 대륙과 인종·성별을 가려 차례차례 돌려 가며 준다. 몇 년간 수상자들을 살펴보기만 해도 그 현상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작년엔 북유럽의 백인 남성 작가가 수상했다. 2012년엔 중국이, 2017년엔 영국 국적을 가진 일본인 작가가 받았다. 따라서 올해는 일본과 중국을 제외한 황인종 그리고 여성 작가가 받을 차례였던 것은 분명하다.
누군가 상을 받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작가가 노벨상을 받았다. 국가 권력이 죄 없는 광주 시민과 무고한 제주 양민을 학살했다고 주장한 작품을 쓴 작가, 6·25 전쟁이 북한의 남침이 아니라 ‘주변 국가의 대리전’이라고 믿는 작가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질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노벨 측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했다며 한강에게 상을 줬다. 노벨 심사위원들도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한 셈이다. 그런데 주류 언론들이 나서서 축포를 쏘고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던 사람들이 그 작가의 책을 사겠다고 새벽부터 서점 앞에 줄을 선다.
외국어로 번역된 그 소설을 읽는 세계인들은 대한민국이 시민을 학살한 야만적인 국가였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렇게 역사를 왜곡한 소설 때문에 미개하게 탄생하고 존립한 국가의 국민이 되는 것이다. 축하는커녕 우리 국민이 대노할 일이다.
그런데도 소설은 단지 소설이니 축하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이념과 역사 왜곡이 빼곡하게 담긴 소설을 어떻게 순수문학으로 받아들이고 그 여파를 생각지 않고 단순하게 기뻐할 수 있는가. 그 작가의 수상이 ‘부끄럽고 슬프다’고 쓴 이유다.
중국의 옌롄커를 언급하신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그는 어떤 작가인가요
언론의 보도와 달리 나는 노벨상을 중국에 주어야 했다고 말한 게 아니다. ‘꼭 동양권에 주어야 했다면 중국의 옌롄커에게’라고 썼다. 일반 독자가 옌롄커를 모르니까 작가의 국적을 표기한 것이다.
옌롄커는 중국 당국에 의해 작품 거의 모두가 금서로 지정될 정도로 소설마다 공산주의를 문학적으로 비난한 뛰어난 작가다.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대한민국의 건립과 존재를 부정하는 한강과 중국에 살면서 공산당을 비판하는 소설을 쓰는 옌롄커, 대척점에 있는 작가가 아닌가.
옌롄커는 작가가 쥔 ‘펜이 칼이나 총이 아니라 어둠을 비추는 탐조등이 되어 모든 사람의 영혼을 밝혀야 한다’고 믿는 작가다. 정말 좋은 소설을 읽고 감동받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옌롄커의 작품을 망설임 없이 추천한다.
우리나라 2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공교롭게도 모두 좌파입니다. 이것은 우연일까요
평화상 수상 과정은 아는 분들은 아실 테니까 여기서는 문학에 중점을 두고 말하겠다.
대중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문단과 서점을 장악해 온 유명 작가들의 발언과 작품에선 그들 자신이 나고 자란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이나 자부심은 찾아 보기 어렵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을 읽고 나면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이 나라는 ‘썩은 나라’ ‘부정한 나라’ ‘미개한 독재국가’라는 프레임 안에 갇히게 된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 대한 수치심과 열등감으로 분노하게 된다. 그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작품들만 문단에서 내보내고 평단에서 찬양하고 번역을 후원하고 외국 문학상에 로비하고 수상하면 언론에서는 스타로, 영웅으로 띄워 준다.
그걸 모르니까 좌파 작가가 노벨상 탈 때까지 우파 작가는 뭐했나 비난한다. 배 아파할 시간에 반성하고 소설 쓰고 좋은 번역자 찾아 해외로 진출하라고도 한다. 현실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좌파를 지향하는 정치와 세계관이 성행, 일반인에게까지 상식이 되어 버렸다. 우파적 상식을 말하면 꼰대가 되고 극우가 되어 외면받는다. 어떻게든 좌파적 의견을 표출해야 주목받고 갈채를 얻는다. 문학도 그렇다. 노벨상은 문학의 아카데미상이다. 일반 대중은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상이라고 믿는다. 소설을 안 읽는 독자도 외국에서 상을 받으면 사서 읽는다. 이런 지도를 그릴 수 있어야 왜 좌파 이념만 승승장구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소설은 작가 혼자 하는 작업처럼 보인다. 과거에는 그렇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영화 제작이 그렇듯 소설 문학·노벨문학상도 기획·투자·로비가 필요한 거대사업이다. 소설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좌파 문화계는 조직적으로 체계가 잡혀 있다. 작가를 키우고 후원하는 거대 출판사와 거대 유통 구조가 탄탄하게 형성되어 있다. 실무담당자들도 좌파적 사고 소유자들로 포진되어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다. 좌파의 승자독식은 당연한 결과다.
작가님을 비판하는 이들도 많지만 진실을 믿고 지지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에게 힘 나는 말씀을 해 주세요
이번 사태가 나고 하나밖에 없는 조카에게 일방적으로 절연당했다. Y대 장학생인데 좌파적 사상이 투철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사태를 이야기한 적 없는데 매체를 보고 안 모양이다. 이념은 피보다 진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젊은 세대의 보편적 정서가 이만큼이나 멀구나 싶어 안타까웠다.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 새삼 깨닫기도 했다.
태어나 처음 받는 관심과 시선·모함과 비난과 욕설. 하지만 나쁜 일과 좋은 일은 항상 같이 온다. 뜻밖에도 지금껏 나를 몰랐던 독자님들, 진실을 몰라 어리둥절했던 분들이 댓글로, 안부 글로 또는 메시지와 메일로 격려와 지지를 보내 주신다. 비슷한 일을 겪어 보신 선배님들은 마음 잘 챙기라고 어깨 다독여 주신다.
좌파 진영이 잘나가는 것 같지만, 음주운전을 한 딸 때문에 노벨상 축하도 못 하는 전직 대통령도 있고, 줄줄이 소송이 걸려 옴짝달싹 못 하는 야당 대표도 있다. 모래성처럼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원한 건 없다. 세월은 흐르고 지구는 돌고 시간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건강한 다음 세대를 우리 손으로 키우는 것이다. 30년 후, 100년 후를 준비하는 것이다.
작년부터 TMTU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Trust Me! Trust You!를 상징하는 약자로 인간의 척추를 꼿꼿이 세운 개인, ‘너는 당당한 나를 믿고, 나는 떳떳한 너를 믿는 신뢰 사회’를 만들자는 뜻이 담긴 책갈피 수만 장을 인연 닿는 학교와 선생님·학생들에게 무료 배포했다.
내가 잘하는 것 중 하나가 ‘되돌려 긍정하기’다. 어둠이 오면 빛이 오겠구나, 웃는다. 힘들다 싶으면 반드시 손잡아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음을 알게 된다. 내겐 진실을 찾는 여러분이 희망이다. 우리가 함께한다면, 대한민국은 우리 손으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Trust Me! Trust You!
그 밖에 하실 말씀이 있다면요
작가에겐 글업(文業)을 감당해야 하는 숙명이 있다. 이 일을 하면 저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 씨를 뿌리면 열매를 거둬야 하는 것이 업(業)이다. 지금 내가 겪는 일도 작은 글업이다. 노벨문학상이라는 개인의 커다란 영광을 얻은 한강 작가는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고 무거운 글업을 짊어졌을 것이다. 앞으로 그 업을 잘 감당하길 바란다.
또한 내 글에 주목해서 세상에 널리 소개해 준 타 언론사 기자님들, 뛰어와 비난 퍼부어 준 수많은 분들과 절연한 나의 조카에게도 앞으로 좋은 일만 가득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무엇보다 지금 연재되고 있는 소설 ‘최초의 당신’을 읽어 주시는 독자 여러분과 지면을 할애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스카이데일리에 감사드린다. 11월이나 12월 초면 연재가 끝날 것 같다. 지금 진실과 희망을 찾아 마음을 환히 비출 수 있는 소설을 새로 구상 중이다. 너무 멀지 않은 시간에 더 깊어진 소설로 독자 여러분을 만나 뵐 수 있길 바란다.
기자의 에필로그
김규나 작가의 서면 인터뷰를 마치며 든 생각은 ‘아직 멀었다’였다. 한 작가의 소신 발언에 죽자고 덤벼드는 그들.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처절하게 정의를 외치는 걸까. 그들이 말하는 정의란 무엇일까. 익명성 뒤에 숨어 악플이라는 칼을 휘두르는 그들의 행동은 그들이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는 ‘무력 진압’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진실은 금세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진실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 인간은 최후의 순간까지 품위를 지켜야 한다. 자신의 인격을 포기하면서까지 타인의 입을 막으려는 그들의 진실을 과연 신뢰할 수 있을까. 진보를 외치는 당신들은 조금도 진보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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