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체념해 버린 자신을, 꿈에서 도망쳐 버린 자신을 용서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말하고 있었다. ‘나를 용서해 줘요. 나도 당신들을 용서할게요.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내 자신을 용서할 거예요.’ 유리도, 어머니도 그렇게 자신을 용서하고 가볍게, 이곳이 아닌 어딘가에서 다시 시작하길 원했을 것이다.
지금 여기, 나는 왜 살아 있는 것일까? 이곳을 끝내고 그들처럼 저기, 다른 어딘가에서 새로 시작할 꿈을 꾸지 않았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날 밤, 나는 죽은 것이 아닐까? 지금 내가 그날의 죽음을 넘어 다음 생에 와 있는 게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에바의 말처럼, 삶은 죽어서도 끝나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죽음과 삶이 계속되는 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 있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그 답을 찾아가는 존재, 그것이 ‘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에바의 노트를 덮었다. 하운이 보낸 선물 상자가 눈앞에 있었다. 포장을 풀었다. 붉은색의 하드커버로 고급스럽게 장정된 꽤 두꺼운 책이었다. ‘트러스트 미’라는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재단의 홍보 책자인가, 나는 실망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책을 들고 있는 나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강무훤 두 번째 장편소설’
제목 아래, 볼드체로 선명하게 작가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책을 펼쳤다. 아무것도 없었다. 수백 페이지나 되는 책의 안쪽은 온통 백지였다. 다만 맨 앞쪽에 낯익은 문장이 인쇄되어 있었다.
천 개의 꽃이 피었다는 것은 천 개의 겨울이 있었다는 증거야.
씨앗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하나의 겨울을 견디는 게 아니지.
저마다의 겨울을 홀로 이기는 거야.
죽음의 끝에서 돌아온 씨앗만이 꽃을 피우는 거야.
내가 쓴 첫 번째 소설 속 문장이었다. 발바닥에서부터 아주 작고 부드럽고 따듯한 무언가가 점점 크고 둥글고 견고하게 팽창되어 묵직하게 밀고 올라왔다. 나는 아직 쓰지 않은 두 번째 소설책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입술을 꽉 깨물었는데도 목구멍이 칼로 베는 것처럼 쓰라렸다.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소설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 밤새 내린 눈밭처럼 펼쳐진 흰 종이를 쓰다듬었다. 연필을 집어 들기만 하면 첫 발자국 같은 문장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령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왼쪽 눈에 이상이 온 건 한 달쯤 전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익숙한 시간이 눈앞을 휙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한 찰나, 나 자신이 아주 멀리 다녀온 것처럼 아득한 기분이었다. 이 장소와 이 시간과 지금 내 모습이, 오래전에도 똑같이 반복되었으리라는 기시감. 그리고 한 치도 다름없이, 앞으로도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으리라는 뜻밖의 안도감이었다.
고개를 돌려 창살이 촘촘하게 박힌 유리창 너머, 손바닥만 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감았다. 한때 눈에 들러붙어 있던 가시처럼 수백 개의 빛으로 분산된 빛들이 내 눈을 쓰다듬었다. 태양이 쏜 화살 하나가 먼 길을 날아와 내 심장에 명중한 것처럼 울컥, 가슴이 뜨거워졌다.
끝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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