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통제할 수 있는 파도는 있는가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전문가칼럼

김성수의 생활명상 즐기기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파도는 있는가

그 동안에도 사건은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김성수 필진페이지 + 입력 2021-01-29 10:25:25

커피 숍에서 평소 즐기던 커피를 시켜 마셨다. 스트레이트 펀치 같은 쓴맛과 살짝 에두르는 듯한 고소미, 뒤끝에는 미세한 신맛이 어른거리는 드립 커피다.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감이라더니, 문득 고급 미니카에 승차한 느낌이 이럴까 싶다. 창밖은 오랜만에 햇빛이 진하다. 눈살을 찌푸려 반사광을 적절히 차단하고 겨울 속 따스함에 잠겨 잔 가장자리를 내 입술 사이에 기울였다가 내려놓고 다시 기울이곤 했다. 일은 그때쯤 발생했다. 커피가 바닥을 보이면서 잔 기울기가 내 인중과 거의 직각이 될 무렵, 윗입술에 뭔가 딱딱한 이물감이 걸렸다.

뭐지? 다소 딱딱하고 날카롭게, 윗입술 안쪽을 쿡 찌르는 듯한 감촉에 나는 진저리를 치면서 혀를 놀렸다. 그 판국에도 이물질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던지, 혀끝으로 그것을 조심스레 밀어낸다. 말갛게 검은 커피 물색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바닥난 잉크빛 물에는 엉뚱한 곳에 찍힌 쉼표 같은 물질이 찻잔 가장 자리에 드러누워 있었다. 나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집어 올렸다. 뭐야, 이거! 치솟아오르는 불쾌감과 동시에 나의 시선은 카운터 쪽에 꽂혔다.

카운터와 주방이 함께 있는 그곳에는 머리에 검은 천 캡을 둘러쓴 청년과 대학생 알바로 보이는 여직원이 주문을 받거나 비이이잉 소리를 내는 음료 기계 앞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워낙 실감 나지 않은 일이 발생한 탓인지 나는 망연히 그 정경을 바라보았다. 커피 속에서 손톱이 나올 수 있다니. 저 불결한 놈이 잠겨있던 음료를 즐겼단 말이지. 순간적으로 원효 대사의 해골물 설화까지 떠올랐다. 아, 이런! 중얼거리면서 카운터 쪽으로 가려는 순간, 몇 가지 생각이 발동 걸린 터보 엔진처럼 우웅, 일어났다. 두서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은 이랬다.

이 바보! 이미 벌어지고 만 일이잖아. 이것이 저 직원들 것이라는 증거도 없어. 아마 저 직원들도 너만큼이나 믿기지 않을 걸! 무슨 수로도 저들을 설득시킬 자신도 없잖아. 저들 또한 할 수 없이 인정하면서도, 늙어 죽을 때까지 인정하지 못할 거야. 게다가, 아무리 따져 묻고 화를 버럭버럭 내질러도 몸에 들어간 커피는 절대 몸 밖으로 나오지 않을 거라구. 이미 벌어지고 만 일. 그리고…

조물주도 돌이킬 수 없게 된 일이다. 그동안 나는 오랜만에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정도면 되지 않았나?

이런 일이 바다의 파도라면 얼마만한 높이의 파도 같은 일일까. 조각배를 흔들만한 파도일까. 백 톤급 어선을 흔들만한 물덩이일까. 수만 톤 화물선을 뒤흔들만한 파도일까.

파도 마루에서 춤추기

보기에 따라서 바다를 가르는 카누처럼 생긴 그 손톱 쪼가리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요놈은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요것이 내 인생의 파도라면 얼마만한 파도일까. 그래, 저 커피숍 주방에 있는 두 사람 중 어느 누군가가 손님 없는 한가한 시간에 손톱을 깎았다 치자. 어느 순간 손톱깎이에 툭, 잘린 손톱 한 쪼가리가 허공으로 튀어올라 용케도 한 시간 쯤 후에 내가 마실 커피잔 속으로 달칵 떨어진다.

종업원의 손톱 쪼가리가 내가 마실 커피잔 속에 달칵 떨어지는 그 순간,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돌이켜보니 그 시간 즈음, 나는 행정노조 위원장을 만나기 직전이거나 서로 마주 보고 앉아서 임금 피크제 따위의 협약에 관해 신경을 곤두세운 채 온갖 머리를 굴리고 있지 않았을까. 말 한마디 날리면서도 상대 표정을 맹수처럼 예리하게 감지하고, 다음 말을 되씹으면서,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표정을 지어야 하나 저 표정을 지어야 하나, 고르고 굴리고 삼키고 뱉고 있었을 터였다.

돌이켜보면, 이 사건은 그 동안에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초 단위의 계획을 세우고 극강 훈련으로도 쉽지 않을 일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예쁜 손톱은 그의 몸에서 잘려나와 허공으로 떠오르고, 그 순간 나는 미구에 내 몸속에 들어올 커피 속 이물질에 대해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노조 위원장의 눈빛 따위를 염탐하고 있지 않았던가.

손톱과 커피라는 이질적 사물의 돌연한 충돌. 내 기억 속에 있지 않은 낯선 조합을 경험한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고, 거부하고, 분노했었다. 잘 돌아보면 내 안에서 색다른 감정이 일어나는 모든 순간에는 유사한 방식의 충돌이 있었다. 결이 같은 물의 흐름이 이질적인 사물을 만나서 파도를 만들듯. 불쾌감, 두려움, 슬픔 따위의 감정 파도가 일어나는 순간에는 이런 만남이 있게 마련이다.

살면서 불가피한 것이 충돌뿐이랴. 숨을 쉬는 것도 불가피하고 먹고 자는 것도 불가피하다. 모든 생명은 불가피한 것이 끝날 때 삶도 마감한다. 이런 판국에 불행이나 불운, 불쾌, 불만 따위만을 내 생애 불가피한 것으로 설정해놓을 일인가. 그것은 마치 커피와 손톱의 만남을 체험하는 순간 당연히 ‘분노’에 휩싸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마음을 고요히 하고 들여다본다. 내 안에서 일렁이는 생각이나 감정의 파도들. 그것들을 가만히 지켜보기. 속이 텅 빈 비치볼처럼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의 물결 위에 가만히 존재해보기. 그것은 깨지지도 가라앉지도 무서워하지도 화내지도 않는다. 그것 내부에는 생각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감정이 들어있는 것도 아닌 듯하다. 비어있고 이완돼 보인다. 가볍다. 거친 파도 위에서 너울거린다. 파도의 높이와 소리와 뒤섞임을 용케도 온전히 받아들여본, 그날이다. _()_

김성수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