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자의 주요 노후자금인 퇴직연금의 ‘디폴트 옵션(default option)’ 도입을 두고 금융투자업계와 보험업계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양측 다 도입에는 찬성하고 있지만 디폴트 옵션에 원리금 보장형을 포함시킬지 여부를 두고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퇴직연금이 수년째 덩치(적립금)만 키우고 정작 근육량(수익률)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퇴직연금 수익률은 2%대로 다른 투자수단은 물론이고 10%대 수익률을 올리는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등과 비교해도 저조하다. 이에 수익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디폴트 옵션 도입에 대한 논의가 관련 업계와 국회를 중심으로 한창이다.
2020년 말 적립금 255조원, 수익률 고작 2%대
퇴직연금은 3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확정급여(DB)형은 근로자가 받을 퇴직급여는 미리 확정되고 회사만 운용 실적에 따라 수익 또는 손실이 나는 구조다. 확정기여(DC)형은 근로자 직접 운용으로 수익 또는 손실이 발생하며, 개인형 퇴직연금(IRP)은 재직 중 자율 가입하거나 퇴직 시 받은 퇴직급여를 이어서 적립하고 직접 운용하는 형태다. 퇴직한 뒤 연금과 일시금 중 선택할 수 있다.
25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255조5000억원으로 전년(221조2000억원)보다 34조3000억원(15.5%) 증가했다. 퇴직연금 적립금은 2017년 168조4000억원, 2018년 190조원, 2019년 221조2000억원, 2020년 255조5000억원 등으로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퇴직연금 전체 적립금 가운데 DB형 적립금은 153조9000억원으로 60.2%를 차지했다. DC형은 26.3%인 67조2000억원, IRP는 13.5%인 34조4000억원이었다. 적립금 증가율은 IRP가 35.5%로 가장 높았다.
특히 퇴직연금 평균수익률은 2.58%로 전년 대비 0.33%p 오르는 데 그쳤다. 그나마 2018년 1.01%, 2019년 2.25% 등 매년 소폭 상승세를 이어갔다. 같은 기간 코스피는 약 30%, 코스닥은 45% 가량 올랐다. 비슷한 성격인 다른 연금의 지난해 수익률은 국민연금 9.7%, 공무원연금 10.7%, 사학연금 11.49%였다.
이처럼 퇴직연금 수익률이 낮은 데에는 적립금 대부분이 원리금 보장형에 몰린 탓이 크다. 전체 적립금 255조5000억원 가운데 원리금 보장형은 228조1000억원으로 89.3%를 차지한 반면 실적배당형은 27조4000억원으로 10.7%에 불과했다.
금융상품 투자 기본값으로 ‘디폴트 옵션’
현재 퇴직연금은 가입 후 따로 운용 지시가 없으면 원리금 보장형으로 운용된다. 원리금 보장형이 기본값(default)이다. 디폴트 옵션은 이를 원리금 보장형에서 실적배당형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지난해 원리금 보장형의 수익률은 1.68%에 불과했으나 실적배당형 수익률은 10.67%를 기록했다. 제도별 수익률은 확정급여형 1.91%, 확정기여형·IRP특례 3.47%, IRP 3.84%로 집계됐다.
25일 현재 국회에는 디폴트 옵션 도입을 담은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퇴직급여법)’ 개정안 3건이 발의돼 있다. 올해 세 차례 법안소위원회에 올랐으나 여야가 합의점을 찾지 못해 계류 중이다. 안호영·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 안은 디폴트 옵션에 실적배당형만 넣었고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 안은 실적배당형과 원리금 보장형을 모두 디폴트 옵션에 넣었다.
안호영 의원은 “퇴직연금이 노동자들의 진정한 노후자산이 될 수 있도록 선진 자산운용 방식을 도입하자는 취지다”라며 “자산운용 역량이 부족한 퇴직연금 가입자의 수익률 제고를 돕기 위한 제도적 지원방안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윤창현 의원실 관계자는 “실적배당형 상품이 아무리 안전하게 운용돼도 원리금 보장과는 다르다”며 “원리금 보장형이 디폴트 옵션에 들어가면 만기 뒤 가입자와 연락이 닿지 않아도 원리금 보장형이 선택된다”고 말했다.
금투업계 “보장형 포함 불필요” vs 보험업계 “수급권 보호 최우선”
금융업권은 퇴직연금의 수익률 제고 필요성에는 공감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증권사·자산운용사 등 금융투자 업계는 여당 안을, 은행권·보험업계는 야당 안을 지지하는 구도다.
금융투자 업계는 디폴트 옵션에 원리금 보장형이 포함되면 퇴직연금 수익률 향상이라는 제도 도입 취지가 훼손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박종원 서울시립대 경영학 교수는 한 전문가 간담회에서 “(디폴트 옵션 도입해도) 퇴직연금 가입자가 디폴트 옵션 적용 제외를 선택할 수 있고 사전 교육을 통해 방어기제를 충분히 가질 수 있다”며 “디폴트 옵션에 원리금 보장형 상품을 두는 것은 큰 실익이 없다”고 말했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디폴트 옵션 제도를 도입한 국가 중 원리금 보장상품을 넣은 사례는 일본이 유일하고 수익률은 연 1~2% 수준인데 반해 원리금 보장상품 옵션이 없는 호주는 수익률이 연 7%대이다”고 외국 사례를 소개했다. OECD 국가 중 디폴트 옵션 미도입 국가는 한국 포함 4개국이다.
반면 은행권·보험업계는 지금도 관심만 가지면 실적배당형으로 운용을 지시할 수 있고 디폴트 옵션을 도입하더라도 금융소비자에게 선택권을 보호해야한다는 입장이다. 김대환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는 “주식형 펀드와 같은 실적배당형에 투자하면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단기 변동성이 큰 실적배당형으로만 디폴트 옵션을 구성하면 근로자의 수급권을 크게 저해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생명보험협회 관계자는 “(디폴트 옵션 도입 시) 근속 연수가 짧은 근로자들이 큰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며 “실적배당형을 강요하지 말고 원리금 보장형에 대한 선택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수익을 얻기까지 일정 기간 투자가 어려운 근로자가 수익률이 좋지 않은 시기에 퇴직하면 손해를 입기 쉽다.
제3의 옵션도 있다. 강순희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은 “DC형 퇴직연금 가입자가 운용방법을 선택하지 않은 경우 노사가 사전에 정한 방법으로 운용하는 디폴트 옵션 도입(이 필요하다)”면서 “장기적으로 은퇴 이전에 중도해지를 어렵게 하고 장기적립 유도를 통해 고령화 시대에 퇴직연금이 노후소득을 책임지는 ‘준공적 연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퇴직연금 제도에서 DC형은 합리적인 장기투자의 어려움을 근로자 개인의 역량과 책임에 맡긴 구조적인 문제점을 드러낸다”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한 집합운용DC(CDC) 제도나 디폴트 옵션 같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국가의 기본적인 책무다”라고 강조했다.
[김학형 기자 / 판단이 깊은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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