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범 금융위원장이 어제(8일) 취임 100일을 맞았다. 고 위원장은 취임 이후 강력한 대출 규제 드라이브를 걸어 가계대출 증가세를 잡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이 속출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특히 대출 실수요자와 중저신용자의 피해가 심각 수준에 이른다는 점에서 문재인정부가 내세운 ‘포용적 금융’이 공염불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구원투수’ 투입된 고승범, 물·불 안 가리고 가계대출 증가세 늦추기에 골몰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임명된 당시 가계부채 증가 상황은 심각했다. 지난해 가계부채와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간 격차는 역대 최대인 7.5%p까지 벌어졌다. 올해 들어서도 은행 가계대출은 8개월 만에 57조원 넘게 폭증하며 1000조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고 위원장 취임 시점인 지난 8월 기준 전(全) 금융권 가계부채 증가율은 1년 전보다 9.5%나 급증했다.
올해 가계부채 증가율을 5~6%선에서 막겠다는 정부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고 위원장은 사실상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할 구원투수로 평가받았다. 앞서 그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재직 시절부터 금리 인상 소수의견을 내는 등 ‘매파(통화긴축 선호)’로 분류됐었다.
실제로 고 위원장은 취임 후 가계부채 문제 해결에 총력을 기울였다. 지난 9월 27일 “가계부채 총량 관리의 시계를 내년 이후까지 확장하고 대책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강도 높은 조치들을 지속적·단계적으로 시행해나가겠다”라고 밝힌데 이어 10월 26일 가계부채관리 추가 대책을 발표했다.
핵심은 당초 내년 7월부터 시행할 예정인 2단계 ‘차주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40%’를 내년 1월부터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집값과 상관없이 총 대출액이 2억원을 넘으면 DSR 40% 규제가 적용되고 내년 7월부터는 대출이 1억원만 넘어도 적용받게 된다.
또 ‘풍선효과’를 의식해 제2금융권에 대한 DSR기준을 50%로 강화하고 DSR 산정시 카드론을 포함하며 주담대와 신용대출의 분할상환을 유도하는 방안도 담겼다. 다만 서민층 실수요자 피해 최소화를 내세워 올해 취급된 전세자금 대출을 대출총량 한도에서 제외했다.
금융당국의 강력한 가계부채 대책의 영향에 따라 7월 15조3000억원으로 정점을 찍었던 월별 가계대출 증가규모는 8월 8조6000억원, 9월 7조8000억원, 10월 6조1000억원, 11월 5조9000억원 등으로 꾸준히 줄었다. 같은 기간 전년 대비 가계대출 증가율도 7월 10.0%로 최고점을 찍었다가 11월 7.7%까지 감소했다. 금융위의 대출압박과 한국은행의 두 차례 기준금리 인상 등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결과다.
집값폭등 염두한 대출규제에 고리채 내몰리는 서민들, ‘포용적 금융’은 온데 간데
고 위원장의 가계대출 옥죄기는 수치상으론 성공에 가까웠지만 국민에겐 재앙과도 같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8월 NH농협은행의 주택담보대출(주담대) 전면 중단을 시작으로 가계 부채 증가율 목표치를 초과한 은행들이 속속 일부 대출 상품의 취급을 중단하면서 ‘대출 절벽’ 사태가 일어났다.
여기에 총량 관리 조치 시행되기 전 주택을 계약한 무주택 실수요자들이 잔금을 치루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은행들이 우대금리를 축소하고 대출금리를 올리면서 대출금리와 예금금리의 차이인 예대마진이 3분기 1.8%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대출규제로 인한 국민 피해가 갈수록 커지자 정부와 여당인 민주당은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다. 당정협의를 갖고 실수요자에 한해 전세대출을 4분기 총량 관리 대상에서 제외하고 장례·결혼 등에 따른 긴급 자금 수요에 대해서도 연소득 한도를 넘어서는 신용대출을 예외적으로 허용키로 했다.
금융위 역시 기존의 강경입장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대출규제 완화를 검토하기로 했다. 고 위원장은 3일 기자간담회에서 “내년도 금융권 가계부채 총량관리시 중·저신용자 대출과 정책서민금융상품에 대해 충분한 한도와 인센티브를 부여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사실상 총량 관리에서 제외하겠다는 입장으로 풀이됐다.
조동근 명지대 경영학과 명예교수는 “국민소득 3만달러의 국가면 시장경제가 제대로 정착됐다고 봐야한다”면서 “그런 나라일수록 금리의 가격 조정 기능에 맡겨야지 (총량규제와 같은) 수량규제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총량 규제는 예측할 수 없다”면서 “총량 규제를 하다보면 대출 가수요가 생기게 되고 이는 불확실성으로 이어진다”고 우려했다.
대출규제로 인한 국민 피해가 갈수록 커지면서 화살은 청와대를 향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 줄곧 주창해 온 ‘포용적 금융’은 공염불이 됐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앞서 문재인정부는 금융당국의 4대 전략 중 하나로 ‘포용적 금융’을 제시했다. ‘포용적 금융(Financial Inclusion)’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기회를 제공해 금융 소외계층의 금융 접근성을 높이려는 정책 등을 뜻한다.
이후 2018년 1월 금융위는 △취약 채무자 보호 강화 △서민 금융부담 완화 △국민 재산형성 지원 △금융권 사회적 책임 강화 등을 골자로 한 포용금융정책 방안을 발표했다. 또 가계부채 관리 추가대책을 내놓으면서도 서민 실수요자를 위한 대출은 자금 수요가 분명하다면 가급적 제한이 없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당시 고 위원장은 “취약계층이 대출을 이용하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내년 1월과 7월 차례로 강화되는 DSR을 적용받는 차주는 각각 전체의 13.2%, 29.8% 수준에 불과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집값을 잡겠다며 펼친 강력한 대출규제로 인해 ‘포용금융’은 뒷전으로 밀렸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주택을 산 무주택자나 전세자금 마련에 나선 실수요자들이 자금난에 빠지면서 ‘풍선효과’로 인해 제2금융권으로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대부업체들은 아파트 대금 잔금을 치루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주택 매입 자금용 대출 상품을 내놓는 실정이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일괄적인 대출 규제보다 주택 거래 계약일에 따라 총량규제를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등 보완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실수요자들을 살려주는 게 중요한데 당분간 (금융당국이) 더 이상 내놓을 대책이 없다”면서 “거시경제가 안 좋아 금리 올리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주목되는 사실은 대출규제로 인한 후폭풍이 갈수록 심해질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정부는 코로나 위기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2020년 4월부터 시행중인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 대한 대출 만기연장 및 이자 상환유예 조치에 나섰는데 내년 3월이면 혜택이 종료된다. 소상공인 등에 대한 대출·보증 만기연장 및 이자상환유예 규모는 355조2000억원 수준이다.
이에 대해 고 위원장은 3일 기자간담회에서 “만기연장·상환유예 종료에 따른 급격한 상환부담 완화, 채무조정 등과 관련한 섬세한 연착륙 방안 마련에 이미 착수했다”면서 사실상 더 이상의 연장조치가 없을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