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살아간다. 스마트폰 속 연락처와 SNS 친구들, 매달 주고받는 경조사비는 우리가 세상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착각을 준다. 그러나 소주 한잔이 생각나는 쓸쓸한 늦은 밤, 망설임 없이 전화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는 과연 몇이나 될까.
잘나갈 때는 문전성시를 이루다가도 몰락하면 곁에 남는 사람이 드물어지는 세태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되었을 때, 그를 둘러싸던 사람들의 발길은 뜸해졌다. 그런 그에게 중국에서 어렵게 구한 책들을 보내온 이가 있었다. 벗 이상적이었다. 추사는 그 한결같은 마음에 대한 감동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아 ‘세한도(歲寒圖)’라 이름 지었다. ‘논어’의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구절처럼, 추사는 시련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벗의 마음을 소나무에 담은 것 같다.
오늘날 우리가 우정이라 믿는 관계에는 생각보다 깊지 않고 쉽게 흔들리는 것들이 많다. 나 역시 경조사에 한 번 불참한 일이 인간관계의 실체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 적이 있다. 수십 년을 이어온 관계도 경조사에 한 번 불참하거나 기대만큼의 축의금을 주고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틀어지곤 한다. 우정이라 믿었던 관계의 상당 부분이 서로의 경조사를 챙기는 의무와 손익 계산으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경조사를 챙기는 일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축의금의 액수나 참석 여부를 상대의 마음을 재는 잣대로 삼을 때 생긴다. 5만 원과 30만 원이라는 돈의 차이를 마음의 깊이로 해석하는 순간, 축하와 위로를 전하는 일은 의무가 되고 계산으로 변한다. 우리는 그동안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지극히 계산적인 관계를 지탱하느라 시간과 감정을 허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유지해야 할까. 우정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친구냐 아니냐의 이분법으로 관계를 나눈다. 하지만 삶에서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속마음을 나누는 벗이 있는가 하면, 술 한잔을 함께하는 술친구도 있고,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 지인도 있다. 관계의 친밀도와 역할은 저마다 다르다.
문제는 이처럼 서로 다른 층위의 관계를 모두 ‘친구’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며 똑같은 진심과 의리를 기대한다는 데 있다. 모든 사람과 깊은 우정을 나누려 애쓸 필요도 없고, 반대로 가벼운 관계라 해서 그 의미를 깎아내릴 필요도 없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벗이 있다면 삶은 한층 든든해지겠지만, 모든 관계가 꼭 그만큼 깊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술친구에게서 인생의 동반자를 기대하고, 지인에게서 벗의 의리를 바란다면 기대와 현실은 어긋날 수밖에 없다. 술친구와는 술 한잔의 즐거움을 나누고, 지인과는 가벼운 안부를 나누면 된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가 구성원마다의 강점과 역할을 인정하듯, 우리도 인간관계마다 다른 역할과 의미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관계마다 다른 깊이를 헤아릴 때, 시련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내 곁의 소나무가 누구인지 더 분명히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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