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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아빠 엄마 이야기…엄마의 싸움(교육)과 아버지의 노름④

정년퇴직 후 모신 ‘뇌경색 아버지·치매 어머니’

반복도 연습도 없는 죽음…삶을 나누고 흔적을 추억하는 기쁨 얻어

스카이데일리(skyde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7-04-16 16:08:46

 
 ▲ [사진=국민대통합위원회]
팔 남매를 둔 아버지는 92세이며 뇌경색 2급으로 불편한 몸이시며 대, 소변을 가리지 못하시고 엄마는 치매 3급으로 두 분이 함께 충남 계룡에 있는 요양원에 계셨다. 나는 이런 부모님을 집에서 모셔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정년퇴직을 하고 난 후에 어떻게 하면 내가 부모님을 모실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남편한테 먼저 부모님을 모시자고 했을 때, 흔쾌히 함께 노력하자고 하는 말이 나에겐 참 신나는 대답이었다. 우리는 팔 남매가 되기 때문에 모두의 허락 아니면 동의를 구하는 일이 그리 쉽진 않을 것 같아서 우선 대전에 있는 세 명의 아들들과 올케를 만나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갔다.
 
나는 아들들과 차근차근 설득하는 마음으로 왜 내가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지를 털어놓고 진지하고 신중하게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다. 아들들 내외는 누나가 모시면 안 된다고 말을 했다. 그 이유는 누워 계신 아버지와 정신없는 엄마를 누나가 모신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면서 요양원에 그냥 계시게 하자고 했지만 나는 끝내 내가 모실 기회를 한 번만 준다면 잘해보겠다고 몇 번이고 말을 했고 또한 부족한 건 서로 채우고 협력하자고 했다. 내게도 부모님을 모실 기회가 있다는 건 특별한 복이라 생각하면서 간청했기에 마침내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이런 분들을 부족한 내가 모시기엔 사실은 아깝다. 얼마나 소중한 분들인지 전쟁과 보릿고개라는 힘든 날들을 지내는 때에도 나를 버리지 않고 기저귀 갈아가며 키워 주신 걸 생각하면 부모님의 똥오줌 갈아줄 기회를 내 어찌 놓칠 수 있으리 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집에 오는 기차 안에서 생각했다. 본인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모든 것을 남의 손에 의탁해야만 생활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그래도 부모님은 자식이 힘들까 봐 요양원이 좋다고 했지만, 식욕이 왕성하신 아버지는 늘 배가 고프다고 말씀을 하셨다. 이런 말을 들을 때는 내 마음이 죄스럽고 안쓰러워 빨리 모셨으면 하는 마음이 불 일 듯 일어났다. 내 집에는 먹을 것이 풍족하건만 아버지는 요양원에서 주는 밥이 너무 적아서 엄마가 들어오면 먹을 것을 가지고 올까봐 엄마 손만 바라보셨다고 한다. 엄마는 밥반찬으로 구운 김이 나오면 먹지 않고 휴지에 싸 들고 방에 와서 김을 뚤뚤 말아 아버지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드시게 했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내 가슴을 적셨다.
 
구운 김이 나오는 날은 아버지 입에 넣기 위해 엄마는 한 번도 먹지 못했는데 이젠 그것도 할 수 없게 됐다고 하셨다. 김 싸 나르다가 들켰기 때문에 엄마는 김을 먹을 때 아버지 생각에 잘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또 애타는 마음으로 눈물을 꿀꺽 삼켰다. 그래서 나는 먹을 것을 실컷 드리겠다는 마음에 너무 기뻐서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하나님! 내 집에 부모님이 오십니다. 그리고 감사했다.
 
부모님 모시러 토요일 날 아침 일찍 서울에서 여동생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내려갔다. 아버지와 엄마가 차를 타고 편히 올 수 있도록 방석과 쿠션을 준비하고 차 안에서 드실 간식도 준비했다. 요양원에 도착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부모님께 우리 집에 가셔서 재미있게 함께 살자고 말씀드렸다.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엄마는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편한데 왜 딸한테 가느냐고 하면서 완강하게 거절을 하셨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서글픈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월요일에 큰언니랑 함께 대전에 내려가서 부모님을 모셔오기 위한 작전을 꾸미고 두 분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했다. 그다음 토요일 부모님이 우리 집에 안 오신다면 어찌할까 하는 두려움 마음도 있었지만, 여동생과 함께 요양원에 도착했고 좋은 기분으로 부모님을 만나서 모시고 요양원을 나올 수 있어서 참 행복했다. 우리 집에 도착하면 바로 드셔야 할 곰국과 반찬을 준비해두었기에 우리는 피곤한 몸이지만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돌”만 빼고 모든 것이 다 맛있다고 말씀하셨다.
 
부모님이 내 집에서 나와 함께 삶을 같이한다는 것이 바로 기적이다. 아버지를 위해 환자용 침대를 임대하고 아버지 방을 정해두면 자녀들이 방에 들어가야만 볼 수 있지만, 거실 중앙에 침대를 놓고 오가는 자녀들을 아무 때나 다 볼 수 있도록 설치했다. 아버지는 뇌경색을 앓고 계시는 동안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모두 어린아이와 같아서 많이 외로워하시거나 아니면 같이 있어 주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버지의 좋은 친구가 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친구가 되면 편하게 말을 할 때도 또한 대소변 갈 때도 식사를 할 때도 모든 것이 아주 좋을 듯싶어서 나는 급히 서로 친구가 되는 각서를 만들고 엄마를 증인 삼아 아버지와 나는 다시 친구가 됐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말을 때론 편하게, 때론 질서 없고 웃고 떠들면서 엄마에게 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나에게 털어놓곤 하셨다.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서 기뻐하시면 엄마도 함께 좋아하고 나랑 친구가 돼서 잘 지내는 걸 보고는 아주 흡족해하신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친구를 했더니 목욕할 때도 어색하지 않고 우린 서로에게 도움이 됐다. 아버지가 나로 인해 기뻐하시는 걸 보고 있으니 내가 우리 집에 모셔온 것을 보람 있게 생각하고 날마다 힘은 들지만 때로는 너무 좋다는 걸 느낀다.
 
아버지가 때로는 하체에 손을 넣어 대변을 주무를 때도 있고 벽이나 침대 주위에 있는 물건에 문지르고 계실 때도 있어서 나는 손 소독제로 씻기도 하고 식초로 닦기도 하면서 주위를 청결하고 편하게 해주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운지 아버지는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내가 말한다. 우리는 아주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하면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하면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좋아한다. 나는 아버지를 보면서 앞으로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하나라도 더 잘 해주고 싶다. 그리고 또 있다. 대소변을 자주 하시기 때문에 목욕은 하루에 서너 번을 해야 하는 때도 있고 항상 먹을 것을 달라 하시는 우리 아버지, 나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열심히 하는 가운데 생각했다.
 
옛날에 이런 말이 있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실감 난다. 처음에는 최고로 모시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작심삼일이 아니라 세 시간마다 마음을 다 잡아 먹으면서 최선을 다했다.
 
잘 계시던 어느 날 점심 식사 때 조금 드시다가 먹기 싫다고 음식을 처음으로 거절하셨다. 오후 3시쯤 깊은숨을 몰아쉬고 아주 불안해하시는 것을 느꼈다. 내가 옆에만 앉으면 나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고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셨다. 그래서 나는 불안하냐고 물어보니 불안하다고 하셨고. 그래서 기도할까요 했더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기도를 하고 난 뒤에도 계속 숨을 깊이 있게 또한 가슴이 벌떡거릴 정도로 크게 움직였다. 그래서 찬송가를 불러 달라 하시는데 그 많은 찬송가 중에서 생각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잠시 후에 나는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 하셨네”와 “내주를 가까이하려 함은” 두 곡을 불러드렸는데도 불안해하셨다.
 
나는 급히 큰 언니와 장남에게 전화해서 병원에 모실 것을 상의하고 왜 이렇게 숨을 쉬고 계시는지 나는 이런 모습을 생전 처음 보았기에 얼마나 힘드실까를 생각하고 119를 불렀고 경희의료원 응급실에도 전화했다. 아버지 시중을 들고 있는데도 왠지 자꾸만 내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편을 불렀고 아버지는 계속 찬물을 요구하셨는데 빨대로 물을 빨아올리지를 못하셨고 숟가락으로 떠드리면 잘 넘기셨다. 남편이 도착해서 조금 있다가 아버지는 크게 한번 천천히 숨을 내쉬고는 주무셨다. 그때 119가 도착했는데 그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셨다. 나는 지금 막 잠이 드셨으니 조금만 주무시고 병원으로 모시기를 요구했지만 오신 분들은 돌아가신 것이 확실하다고 단언하셨다.
 
순간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라 나는 병원에 가서 응급처치하면 꼭 살아날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역시 병원에서도 운명하심이 확실하다. 아니 어찌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갈 수 있을까? 어제도 괜찮았는데 나는 정신을 차리고 팔 남매 모두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고는 주저앉아버렸다. 이렇게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나는 생각했다. 정말 죽는다는 것이 이렇게 쉽게 숨이 멈춘다면 정말 반복도 없고 연습도 없는 생명, 알뜰히 잘살아야겠구나 하는 마음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일평생 살면서 그 누군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바라본다는 건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임종을 지키면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건 기적이라 생각하고 싶다. 아버지는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자녀들을 힘들게 하지 않고 그 아픔을 혼자 견디면서 죽음의 길을 가셨다 끝.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칭찬받을 수 있도록 효자와 효녀를 만들어 놓고 그렇게 홀연히 그 길로 떠나셨다. 3남 5녀 중 큰언니는 육십이 넘어 사회 복지사 자격증을 받아 사업장에서 어르신들을 돌보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엄마를 생각했다. 내 엄마를 내가 섬기리라 작심한 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엄마와 생활하기로 했다. 우리 엄마는 굶어도 배워야 한다는 신념은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았고 ‘혀는 칼이다’라고 하면서 ‘말을 할 때는 입안에서 열 번을 말하고 한번 밖으로 뱉으라’고 했는데 나는 아직도 그 훈련이 잘 안 된다.
 
참 좋은 우리 엄마는 지금 92세이며 치매 3급이고 고관절 뼈가 부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계시지만, 엄마를 가장 많이 닮은 우리 큰언니가 71세가 됐지만 그래도 효심을 아끼지 않고 붓고 그 위에 또 부어 드리면서 효행을 실행하고 있다. 큰언니는 엄마 모시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하면서 때로는 은근히 큰 형부를 칭찬해보기도 하면서 감사한다는 표현을 자주 한다. 그 무엇보다 엄마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복 중에 복이라 늘 말을 한다.
 
옆에서 보고 있는 우리는 큰언니한테 배울 것이 많고 팔 남매 모두는 서로서로 엄마를 아끼며 육십 여섯 살 된 셋째 딸은 엄마 앞에 가면 철없는 아이처럼 먹바우 춤을 추고 난리가 난다. 이런 모습을 남이 보면 당연히 흉을 보겠지만 우리는 이렇게 위아래가 없이 웃음을 선물하고 격려의 등을 서로 두들겨 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엄마와 삶을 나눈다. 큰언니가 늘 하는 말 엄마는 나의 축복이라 선포하면서 오늘도 언니는 엄마를 옆에 모시고 있으면서 그 많은 날을 힘들게 살아오신 엄마의 흔적을 추억하면서 오늘 또 내일도 하루하루를 멋지게 살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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