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MZ세대를 중심으로 시작된 ‘세계관’ 놀이가 기성세대에까지 그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세계관이란 단어의 뜻 자체는 세계를 보는 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뜻하지만 세계관 놀이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를 마치 현실처럼 받아들여 즐기는 걸 말한다. 예컨대 국민MC로 불리는 유재석이 트로트 가수 유산슬이라는 ‘부캐’(부캐릭터)로 활동할 때 유재석인 걸 알지만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인 양 받아들이는 식이다.
세계관 놀이는 부캐에서 더욱 확장된 개념이다. 부캐가 한 인물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춘다면 세계관은 인물뿐 아니라 그 인물을 둘러싼 시공간적 배경과 사상까지 다룬다. 핵심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활용되는 분야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방송·미디어는 물론 광고·마케팅·게임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새롭게 탄생한 캐릭터에서 확장된 세계관을 가지고 소통하는 방식인 만큼 그 범위도 무궁무진하다.
매드몬스터 등 개그맨 주축 부캐 세계관 적극 소비…MZ세대, 세계관 확장 주역
전 세계 60억 팬덤을 거느린 2인조 아이돌 그룹 매드몬스터는 세계관 놀이의 대표주자로 손꼽힌다. 매드몬스터의 이력은 화려하다. 데뷔 이후 3년 연속 전 세계 플랫폼 디지털 싱글 매진을 기록했고, 팝스타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저스틴 비버가 피처링을 요청해도 거절당할 정도로 콧대가 높다. 필터로 만든 것 같은 완벽한 비주얼과 오토튠 말고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보이스를 갖췄다.
이력만 놓고 보면 세계적인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의 위상조차 가볍게 뛰어 넘는다. 대중이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다. 매드몬스터에 대해 처음 들어본다면 어리둥절할 수 있지만 몰라도 이상할 게 없다. 매드몬스터의 이력은 모두 그들이 만든 가상 세계관 내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매드몬스터는 개그맨 이창호와 곽범이 각각 ‘제이호’와 ‘탄’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가상의 아이돌 그룹이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다양한 SNS에서 활동하고 있다. MZ세대는 현실이 아닌 가상의 아이돌 그룹임에도 거리낌 없이 또 진지하게 즐긴다.
일례로 매드몬스터 멤버 간 불화설이 발생하자 한 팬은 매드엔터테인먼트 사옥을 찾아가 항의하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다. 그는 “매드엔터테인먼트 사장인 대디가 관리를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며 “영세 기획사도 아닌 대형 기획사에서 두명밖에 되지 않는 멤버를 어떻게 관리했기에 불화설이 나오냐”고 분노를 표출했다. 이어 기획사 건물에 달걀을 던지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불화설 자체가 가상의 사건임에도 이를 마치 현실인 양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 세계관에 맞게 진짜 팬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매드몬스터의 세계관을 기반에 둔 댓글, 영상 등 다양한 콘텐츠가 2차, 3차 재생산되면서 연성 콘텐츠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매드몬스터의 활동 전부가 가상인 건 아니다. 매드몬스터는 실제로 노래를 발표하고 음악 방송에도 출연했다. 매드몬스터는 올해 5월 Mnet의 엠 카운트다운, 7월엔 MBC의 쇼! 음악중심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이를 본 포켓몬스터(매드몬스터 팬클럽)들은 댓글에 “역시 월클돌(월드 클래스 아이돌), 매드몬스터는 영원하라” “우리 매드몬스터! 드디어 음방(음악 방송) 나왔네요! 해외 스케쥴 때문에 힘들텐데 너무 멋져요!” “나도 모르게 매며들었네(매드몬스터에 스며들었네)” “사랑해요” 등 팬덤 문화를 적극적으로 즐긴다.
개그맨 이창호는 매드몬스터뿐만 아니라 또 다른 세계관에서도 활약 중이다. 한사랑산악회의 이택조 부회장이기도 하고, ‘시가총액 500조원의 코스피 1위 기업’인 김갑생할머니김의 이호창 미래전략실 본부장이기도 하다.
이를 흔쾌히 수용하는 MZ세대는 이호창 본부장 세계관에 빠져 들어, 그가 P4G 서울 정상회의 비즈니스 포럼 연사로서 전 세계인 앞에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선언하는 홍보 영상에 “김갑생할머니김 입사가 꿈이다”는 댓글을 달며 자발적으로 세계관 놀이에 동참한다.
온라인 공간서 가상 인물 실제 존재하는 느낌 구현…세계관 몰입도 강화
가상의 세계관을 현실로 확장할 때에는 인스타그램이 주로 활용된다. 인스타그램은 개인적 취향과 개인의 이야기를 남에게 보여주는 공간이다. 이에 세계관 속 가상 인물은 마치 현존하는 인물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이를 본 이용자들은 가상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친구 게시물에 댓글을 남기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식이다.
인스타그램과 달리 유튜브는 훨씬 적극적인 플랫폼이다. ‘빠다너스’, ‘피식대학’ 등에선 구체적인 스토리와 캐릭터가 갖춰진 세계관이 소비되고 있다. 유튜브 속 세계관은 가상의 인물에 자세한 설정을 부여하고 각 인물을 생생하게 연기해 실존 인물 같은 느낌을 준다.
느끼한 말투와 표정을 뽐내는 ‘최준’은 개그맨 김해준이 분한 가상의 인물이다. ‘철이 없었죠’ 등의 유행어를 선보이는 최준을 본 이들은 처음엔 불편하게 느끼지만 보면 볼수록 중독되는 말투와 표정에 어느덧 팬이 됐다는 반응이다.
대학생 이지영 씨는 “처음 최준의 영상을 봤을 땐 말투와 표정이 오글거리고 느끼해 매우 꺼려졌지만 보면 볼수록 예쁘고 좋은 말들만 했다”며 “남들을 얕잡아보고 깎아내리는 식의 개그를 선보이는 개그맨들이 의외로 많은데 좋은 말로만 사람들을 웃길 수 있다는 게 긍정적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MZ세대는 유튜브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직접 제작하기도 한다. 과몰입 플레이리스트나 여러 세계관을 섞어 상플(상상 플러스의 준말·다른 두 세계관을 섞어 만든 콘텐츠를 의미) 콘텐츠를 만드는 등 세계관을 가공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다.
트위터도 세계관의 주 활동 무대로 꼽힌다. ‘춘식이 그림일기’는 카카오 프렌즈의 캐릭터 춘식이의 트위터 계정이다. 춘식이는 길냥이 출신의 고양이로 라이언이 집에 데려와 그의 반려묘가 됐다. 춘식이가 운영하는 트위터 계정은 대충 손으로 그린 듯한 그림체와 글씨체가 특징이다.
춘식이의 팬들은 자발적으로 춘식이의 콘텐츠를 재생산한다. 예비 월드 스타를 꿈꾸는 춘식이가 팬들에게 아이돌 레전드 의상이나 엔딩 요정 짤을 인용해달라고 요구하면 팬들이 이를 수용해 주는 식이다. 춘식이는 트위터 계정에 팬들의 콘텐츠를 리트윗하면서 실제로 춘식이가 존재하는 것처럼 소통한다. 이용자들이 세계관에 더욱 몰입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가상 넘어 현실 광고모델까지…기업·브랜드, 앞다퉈 세계관 마케팅 동참
세계관 문화가 확산하면서 이와 관련된 시장 규모 역시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어떤 분야에서든 쉽게 수용 가능하고 잘 융화할 수 있다는 세계관의 장점에 힘입어 관련 시장이 매우 방대해지고 있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국내 광고 시장의 성장도 점쳐진다.
제일기획이 발표한 ‘대한민국 총 광고비 결산 및 전망’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총 광고비는 11조9951억원이다. 전년 대비 0.8% 감소한 수치다. 그러나 올해는 세계관이 녹아든 광고가 늘어나면서 지난해보다 4.6% 증가한 12조55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됐다.
롯데제과는 꼬깔콘의 주요 고객층인 MZ세대와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세계관 놀이에 동참했다.매드몬스터를 모델로 발탁해 아이돌 광고의 성지인 지하철 광고를 진행했다.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지하철 광고 현장을 방문해 응원 메시지를 남기고 개인 SNS에 인증샷을 올리며 포켓몬스터임을 자처했다.
롯데푸드도 래퍼 마미손을 돼지바 핑크 모델로 발탁했다. 협업해 만든 뮤직비디오 ‘PIGGY’는 조회수 300만회를 돌파했다. 모델 선정 과정부터 화제가 됐다. 돼지바 핑크를 본 래퍼 마미손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모델 제안을 했고, 롯데푸드가 이를 수용하면서 MZ세대를 공략하기 위한 광고 캠페인을 시작했다.
샌드위치 브랜드 써브웨이는 최근 신제품 스파이시 쉬림프 샌드위치 모델로 ‘B대면 데이트’의 최준과 ‘05학번 이즈 백’의 쿨제이를 더블 캐스팅했다. 더블 캐스팅이긴 하나 사실 두 모델 모두 개그맨 김해준이 연기하는 캐릭터다. 두 캐릭터가 등장한 광고 영상은 유튜브에서 조회수 440만회를 넘기며 인기몰이 중이다.
광고와 콘텐츠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듯한 영상들은 그들만의 세계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MZ세대가 거부감 없이 광고를 접하고 콘텐츠에서 놀이를 즐길 수 있는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SNS에서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세계관 놀이에 익숙한 MZ세대와 소통하기 위해 국내 기업들이 그들의 세계관에 몰입하고 존중하고 있다”며 “제작된 광고 콘텐츠를 통해 부캐의 세계관이 더욱 확대되고 팬들로 하여금 세계관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고 팬덤을 형성하게 되는 선순환 구조가 마련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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