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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이의 군사이슈

이승만 대통령의 국군 창설과 전력 증강

유지 이어받아 확고한 국방 태세 확립해야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2-06-23 09:40:32

▲ 박정이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예)육군대장
남한 단독으로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반공을 제1 국시로 삼고 남북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안보 역량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정부 수립과 더불어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은 국토 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한다”고 헌법에 규정하고 이에 국방정책의 기조를 두고 시행했다. 
 
당시 국방정책은 초대 국무총리를 겸직한 이범석 국방부 장관이 1948년 8월3일 천명한 시정방침에 ‘연합국방’이란 형태로 표현된 국가안보시책으로 제시됐다.
 
정부 수립 직후의 국방정책은 정부의 시정방침이라는 포괄적인 방침 내에서 그 방향이 결정됐는데, 주요 정책은 연합국방의 추진과 강력한 국방력 건설 그리고 군 조직의 강화 및 조정 등이었다. 
 
국방정책의 목표는 신생 대한민국이 제한된 여건 속에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군사력을 갖추는 한편, 반공 이념에 뿌리를 둔 군의 사상적 통일을 이뤄 사상군대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있었다.
 
이범석 국방장관은 광복군 최고지휘관으로 쌓은 군사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병제일주의’라는 지도 방침을 착상했다. 이는 정병주의에 입각해 사병 개개인의 자질을 조속히 향상시켜 국군 전체의 질적 수준을 평준화함으로써 선진 민주국가의 우수한 군대와 대등한 자질을 갖게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지도방침으로는 ‘사상통일과 반공정신의 함양을 목적으로 한 정훈공작’이 적극적으로 추진됐다. 공산주의자들이 미군정 3년간의 민주화 시책을 기화로 정부 주요 기관과 경비대에 침투해 동조세력을 규합하고 조직망을 확대하면서 군의 안전 유지에 심각한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1948년 11월30일 시행된 ‘국군조직법’에 의해 육군이 정식 발족됐을 때 병력은 보병 5개 여단에 15개 연대 규모로 5만490명이었다. 국군의 증강과 정예화는 국가 기본시책인 동시에 국방정책의 기조로서 계속 추진돼 1949년에는 국군조직법 제13조에 의해 종전의 6개 여단을 각각 사단으로 승격시키고 3개 연대로 편성해 사단의 정원을 1만561명으로 책정했다. 
 
6월10일에는 8사단과 수도경비사령부를 추가로 창설함으로써 국군의 규모는 당초에 목표한 8개 사단, 23개 연대로 확충됐다. 4월15일 해군은 여순사건의 교훈에 따라 상륙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해병대를 2개 중대 규모로 창설했다. 10월1일에는 10대의 경항공기만을 보유한 육군 항공사령부를 육군에서 독립시켜 명실상부하게 공군이 발족됐다.
 
전쟁을 조속히 종결짓기 위해 유엔군과 공산군이 1951년 7월10일 휴전협상을 개시했다. 이 대통령은 휴전협상을 강경하게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수차에 걸쳐 완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해 유엔군의 휴전협상 추진을 견제하려 했다. 이 대통령은 1953년 휴전협상이 타결될 단계에 접어들자 “휴전보다는 오히려 압록강까지 진격을 원한다”는 단독 북진을 시사하는 발언으로 국내외 관심을 끌었다.
 
점차 휴전협상 타결이 확실시됨에 따라 이 대통령은 종래의 태도를 바꿔 휴전협정 체결에 동의하되, 선행 조건으로 미국 측에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한국군 증강을 위한 지원 보장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1953년 6월18일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했다. 
 
새로 취임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이에 동의할 뜻을 밝혔고 1953년 6월25일 로버트슨 특사를 한국에 급파했다. 로버트슨 특사는 “첫째, 미국은 평화적 수단으로 한국의 통일을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 둘째, 휴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 셋째, 휴전 후 가능한 최대의 장기적인 경제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의 대통령 친서를 이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이 대통령과 로버트슨 특사는 휴전회담을 중심으로 전반적인 현안 문제를 토의했다.
 
6·25 전쟁 전시 체제에서도 중대한 정책적 결정이 시행됐다. 유엔군 사령관에게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이양하게 됐고, 육·해·공군의 전력을 증강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한국군 20개 사단 증설, 해·공군력 강화, 그리고 장기적인 경제 원조에 관한 합의 등이 이뤄졌다.
 
육군 20개 사단의 확장안은 1952년 1월에 새로 출범한 아이젠하워 미국 정부의 대한정책인 ‘6·25 전쟁의 조기 종결과 한국군의 증강, 그리고 주한 미군의 감축’에 따라 적극적으로 추진됐다. 휴전 당시에는 3개 군단, 18개 사단, 55만여명으로 확장됐고, 이듬해인 1954년 5월 1개 군사령부, 5개 군단, 65만6000여명으로 증편됐다. 
 
해군은 1950년 10월부터 1952년 8월까지 도입한 PF급 4척, PC급 4척, YMS정 23척 등을 통합해 1함대의 전력을 증강했다. 해군의 지휘 체계는 1함대를 주축으로 통제부, 경비부, 그리고 창급 지원부대를 갖췄다. 휴전당시 해군은 1함대와 그 예하에 6개 전대와 1개 PT편제로 확장됐으며, 병력도 1만2042명으로 증원됐다. 
 
해병대는 증편을 거듭해 휴전 시점 4개 보병대대, 1개 포병대대, 1개 전차중대로 편성된 제1전투단과 연대 규모의 도서부대, 지원부대를 갖췄다. 병력은 2만7500명이었다. 공군은 1개 전투비행단과 1개 훈련비행단 등 2개 비행단으로 성장해 F-51 전투기 80대를 포함해 110대의 항공기와 1만1000명 수준으로 증강됐다.
 
이 대통령은 공산권 및 일본의 위협 속에서 신생 독립국가인 대한민국이 국가 생존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국방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관되게 경제안보보다 군사안보에 우선순위를 두고 국방체제 확립과 군사력 건설에 매진했다. 
 
그는 반공이념에 뿌리를 둔 정병 육성과 반공정신 강화에 주안을 둔 사병제일주의를 추진해 군의 사상적 통일을 이뤄 사상 군대로서 정체성을 확립했으며 이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확고한 이념적 바탕이 됐다.
 
국군조직법 및 국방부 직제령 등 국방 관련 법령을 제정 공포해 국군의 조직, 편성, 교육훈련을 제도화함으로써 군사력을 육성하고 국방체제를 체계적으로 구축할 수 있었다. 통일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건설해 전쟁 개시 시 10만명에 불과했던 국군이 휴전 시 60만 대군으로 증강돼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했다.
 
병역법 제정 및 시행으로 국민개병주의에 입각한 징병제를 도입해 국방체제의 확고한 기초를 이룩했다. 특히,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로 확고한 군사동맹 체제를 구축해 한·미공동방위체제를 확립했다. 이는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는 초석이 됐다.
 

 [스카이데일리 / skyedaily__ , skyedaily@sky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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