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기술은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을 나타내는 지표다. 이 때문에 세계는 첨단기술을 앞세운 산업 경쟁으로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첨단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비롯해 오랜 시간의 기술 축적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산업스파이를 활용하면 적은 자금과 짧은 시간으로 상대국 또는 경쟁기업의 첨단기술을 손쉽게 탈취해 시장에서 기술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산업스파이가 횡행하는 이유다.
세계 각국은 산업스파이의 국가산업기술 탈취 방지를 위해 강력한 법적 제재를 가하는 등 다양한 대응책을 만들어 기술유출 차단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이에 대한 대응책이 선진국들에 미치지 못해 우려를 낳고 있다.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국회 산업통산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이 산업통상자원부 기술안보과로부터 제출받은 국가핵심기술 해외 유출 현황 자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국내 정보기관이 적발한 산업기술의 해외 유출이 56건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외국과의 산업 경쟁력에 큰 영향을 미치는 국가 핵심기술의 해외 유출 적발 건수가 10개나 포함됐다.
또 국가정보원 자료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총 96건의 국내 산업기술이 해외로 유출됐고, 2022년 한국경제인협회가 내놓은 2022년 조사 자료에는 산업스파이로 인해 손해를 본 국내 기업들의 피해액이 연평균 약 56조2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 사례를 살펴보면, 최근 삼성전자의 디스플레이 제조 핵심기술을 중국으로 빼돌린 삼성전자 전직 수석연구원 A모 씨가 산업기술보호법·부정경쟁방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에 구속 기소됐다. 그가 유출한 자료의 경제적 가치는 약 2412억 원에 달하고 이 기술 유출로 한국과 중국의 기술 격차가 최대 10년까지 줄어드는 피해를 입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산업스파이들 때문에 그동안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가 고부가 OLED(organic light-emitting diode·유기 발광 다이오드) 시장에서 압도적인 기술력으로 시장을 지배해 왔지만 조만간 중국 측에 추월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들어서는 유학생이나 연구원으로 위장해 국내 대학으로 잠입하는 산업스파이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국내 산업계나 학계에서는 중국 정부의 지시를 받는 산업스파이들이 유학생이나 연구원 신분으로 대학 또는 교수를 통해 국내 대기업이나 연구소에 취직해 인맥을 쌓은 뒤 첨단기술을 빼돌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미국·영국 등에서는 중국의 기술 탈취를 겨냥한 수사를 강화하고 있고, 대만은 2022년 국가 핵심기술 유출을 간첩 행위로 간주해 처리할 수 있도록 국가안전법을 개정했다. 특히 미국은 기술 유출 피해액에 따라 최소 15년 8개월에서 최대 33년 9개월까지 징역형을 내릴 수 있도록 양형 기준을 마련했다.
우리나라도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가 지난해 하반기 기술유출 행위자에 대한 벌금형을 65억 원 이하로 상향하고, ‘산업기술’ 유출 행위에 대해 30억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여 처벌을 강화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을 의결해 국회 법사위에 이관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산업계는 반발하고 있다. 천문학적인 자금과 수년간 기술자들의 노력으로 개발된 국가 핵심기술을 빼돌렸는데 겨우 수십억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는 것은 선진국들과 비교해 처벌이 너무 약하다는 지적이다.
또 선진국들은 첨단기술 유출에 대해 국가 정보기관이 적극 나서고 있지만 한국은 국가정보원의 수사권이 사라지면서 산업스파이 조직과 인물의 범죄 행위를 포착해도 법률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축소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국회가 여야를 떠나 산업스파이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회는 11월에 법사위에서 산업스파이를 처벌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는 ‘간첩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본회의에 안건을 상정했다.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신설됐던 간첩법이 71년 만에 처음 개정되는 셈이다.
개정되는 간첩법은 적국을 기존 북한에서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로 확대했고, 외국의 지령‧사주‧그 밖의 의사 연락하에 국가기밀을 탐지·수집·누설·전달·중개하거나 방조하는 행위를 ‘간첩 행위’로 분명히 규정했다. 외국을 위한 간첩 행위에 대해서는 3년 이상의 유기 징역형으로 처벌하도록 하면서 처벌 수위도 강화됐다.
첨단기술 유출은 곧 국가경제의 근간을 무너뜨릴 수 있다. 천연자원이 없고 오직 기술력으로 선진국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우리나라로서는 첨단기술 유출은 곧 국가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행위와 다름없다.
늦은 감은 있지만 여야가 뜻을 같이해 산업스파이에게 간첩죄를 적용할 수 있게 개정할 간첩법은 ‘신냉전 체제’에서 국가 존립을 지키기 위한 기반을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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