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11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프리덤 페스트’라는 보수단체 행사장에서 한 20대 여성이 도널드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는 러시아에서 왔습니다. 제 질문은 외교·정치에 관한 것입니다”며 트럼프 후보의 러시아 및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러시아에 부과한 제재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트럼프는 약 5분간의 답변에서 “저는 블라디미르 푸틴을 잘 알고 있습니다 (…) 저는 푸틴과 아주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제재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그 후 트럼프는 제45대 미국 대통령(2017∼2021)에 당선됐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18년 7월15일 그 여성(당시 29세)은 워싱턴 D.C.에 거주하며 외국 대리인 등록도 하지 않고 미국 내에서 러시아 연방의 요원으로 행동했다는 혐의로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됐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부티나(Maria Butina). 1988년 옛 소련(러시아) 시베리아 바르나울에서 태어난 부티나는 알타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고 교사자격증도 받았다. 정치 활동에 관심이 많아 19세에 알타이 크라이의 공공위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2011년에는 모스크바로 이주해 광고 대행사를 시작했다.
이 무렵 그녀는 러시아 연방평의회 상원의원이었던 당시 58세의 알렉산더 토르신(Aleksandr Torshin)과 교류하게 된다. 그는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억만장자였다. 부티나는 후에 러시아중앙은행의 부총재가 된 토로신의 특별보좌관으로 활동하며 그와 함께 수차례 미국을 방문했다. 부티나는 사실상 토르신의 정부(情婦)였다.
부티나는 토르신의 지시에 따라 ‘무기를 소지할 권리(Right to Bear Arms)’라는 총기 옹호 단체를 설립하고 활동했다. 이 단체는 미국 전미총기협회(NRA)와 협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만든 위장 조직이었다. 2013년 부티나는 러시아를 방문한 미 공화당의 저명한 정치 컨설턴트이자 NRA 회원인 폴 에릭슨(1962년생)을 만났다. 나이 차가 26살이나 되었지만 그녀가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동거까지 하게 된다. 그녀는 그를 ‘남자 친구’라고 불렀다.
2016년 8월 부티나는 대미 공작을 본격화하기 위해 학생 비자(F-1)로 미국에 입국해 아메리칸 대학에 대학원생으로 등록했다. 그리고 2018년 8월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녀는 평균 4.0의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으나 실제로는 내연남 에릭슨에게 의존하여 시험과 과제를 완료했음이 드러났다.
워싱턴 D.C. 연방검찰의 기소장에 따르면 부티나는 2015년부터 2017년 2월까지 러시아 연방의회의 일원이었고 러시아 중앙은행의 부총재이며 러시아 정보기관인 연방보안부(FSB)의 협조망인 토르신의 지시에 따라 활동했다. 토르신은 러시아 정부의 해외 불법 활동에 연루된 혐의로 2018년 4월 미국 재무부 외국자산통제국의 제재를 받았다. 그녀의 핵심 혐의는 미국 내에서 러시아 정부의 대리인으로 등록하지도 않고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 하에 NRA에 침투하여 러시아 연방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활동했다는 것이었다.
부티나는 매력적인 외모를 앞세워 성관계를 빌미로 미 보수 정치계 인사들에게 접근했다. 앞서 언급한 폴 에릭슨과 동거했고 또 다른 미국 정계 인사와는 그녀에게 이익 단체에 자리를 만들어 주는 대가로 성관계 한 사실도 밝혀졌다. 트럼프 캠프에 비밀리에 러시아 연계망을 구축하고 트럼프·푸틴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활동했다.
그녀는 NRA와 보수적 종교 단체·전국기도조찬회 주최자를 포함한 연락망을 구축하고 공화당 지도자들과 연결하기 위한 12만5000달러 규모의 작전을 비밀리에 전개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 공화당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NRA 컨벤션에서 위스콘신 주지사 스콧 워커에게 접근해 인연을 맺기도 했다.
FBI가 그녀의 아파트를 압수·수색한 결과 연락처 목록에 러시아 연방보안부(FSB)와 관련된 이메일 계정이 포함되어 있었고 ‘FSB의 취업 제안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라고 손으로 쓴 메모까지 발견되는 등 상당한 증거자료가 발견됐다. 유학생이 아니라 러시아 스파이였던 것이다.
부티나·토르신과 에릭슨은 2020년 ‘2016년 미국 선거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 의혹’에 대한 미국 상원 정보특별위원회의 조사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미국 조야를 떠들썩하게 했고 수주간 언론사 탑뉴스 자리를 도배했다.
부티나는 대학원 재학 중 술에 취해 두 차례나 자신이 러시아 연방요원과 접촉하고 있다고 자랑했는데,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이 그녀를 신고했다. 2017년 5월부터 FBI 요원들이 부티나를 1년간 집중 감시하여 그녀의 스파이 활동을 적발할 수 있었다.
부티나는 체포된 후 외국대리인등록법 위반 등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최대 15년 형을 선고받을 수 있음을 인식하고 형량조정에 나서 연방공모 혐의를 인정했다. 부티나는 2018년 12월13일 유죄를 인정했고, 2019년 4월27일 컬럼비아 특별연방지방법원에서 징역 18개월을 선고받았다. 그 후 플로리다주 연방교도소에서 5개월간 복역하고 2019년 10월 석방되어 러시아로 복귀했다.
러시아로 돌아간 부티나는 미국 정치와 형벌제도 전문가로 활동했다. 2020년 10월에는 자신의 수감생활을 담은 회고록인 ‘감옥일기’ 출간했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공간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녀는 대미 공작의 공으로 2021년 9월 러시아 하원(두마) 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통합러시아 소속으로 당선되어 하원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티나 사건을 보면서 본지 연재 ‘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제2회’에서 다룬 ‘애나 체프먼’을 떠올려 본다. 그녀는 러시아 해외정보부(SVR) 소속으로 2009년 미국에 침투해 활동하다 검거되어 미·러 스파이 맞교환 합의에 따라 석방되어 러시아로 돌아가 영웅 대접을 받았던 애나 채프먼과 비교된다. 미인계는 시대의 변화에 관계없이 영원히 매력적인 첩보 활동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증명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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