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는 진공지대에서 쓰지 않고, 주어진 세대와 더 나아가 자신의 운명 속에서 쓴다. 운명이라는 말은 거창해 보여도 거기엔 과장 없는 진실이 담겨 있다. 그렇게밖에 쓸 수 없는 자가 그 시대의 운명에 근접한다.
필자는 문장 수련을 고도로 강조하던 세대의 문학적 영향 아래 성장했다. 그러나 청춘의 시기에 맞이한 시대는 민주주의 운동의 격류였고, 문장을 매섭게 익힐 기회가 적었다. 이런 때 내가 즐기는 말,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 그 시대가 재래식 이념이 신비의 외관을 쓰고 나타났다 해도, '똑똑하다면' 넘어서거나 비껴갈 수 있었어야 했다.
마찬가지, 문학이 문장 이상의 것처럼 보인다 해도 궁극적으로 문장이며 또 문장에서 출발한다. 이 사실은 변경될 수 없다. 그 시대에 문장을 정확하게, 간결하게, 유려하게, 아름답게, 섬세하게, 활기차게, 고요하게, 기타 등등 쓸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이 영향은 그 다음 세대로, 그 다음 세대로 계속해서 넘겨졌다.
건조하게, 엉성하게, 어설프게, 과장되게, 투박하게, 안 맞게, 어울리지 않게, 감상적으로 써도 그럭저럭 통용되는 시대를 맞이했다.
표현파나 입체파의 붓질은 그 기초를 묻지 않는가? 앤디 워홀이나 키스 해링에게 묘사를 해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림은 묘사에서 주제로 향했고, 이제 소재로 향한 것도 같다.
슈만의 피아노곡 연주가 어느 대목에서 실수를 범하거나 촉급한 음률을 힘겹게 따라붙을 때 '귀명창'들은 놓치지 않는다. 타고난 음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음악에서라면 그 시간성의 예리함 때문에 많은 것을 감추기 더 어려울 것이다.
한국문학은 큰 리듬을 타고 문장의 시대와 주제의 시대를 변주하곤 한다. 주제의 시대에 맞서 자신의 문학을 전개해야 했던 박태원은 그대들은 도대체 왜 깨닫지 못하느냐는 식으로 날카롭게, 도전적으로 힐난했었고, 이는 시대의 흐름을 돌려놓고자 하는 시도였다.
한국사회는 늘 격류 속에 놓여 있고, 이 정치적 시간의 여울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대부분의 문학이다. 문장의 시대란 어쩌면 나의 가공의 시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손창섭이나 김승옥이나 이문구 같은 문장미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이고, 1950년대생 작가들 중에도 최인석이나 김영현 같이 주제파 가운데서도 개성미 넘치는 문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윤대녕이나 전경린의 1962ㆍ1963세대는 상세히 논평하지 않기로 하고, X세대로 넘어오면서 문장은 일층 힘들어졌는데, 노벨상 수상작가를 배출한 세대임에도 문장을 논하기는 쉽지 않아졌고, 이 부담은 21세기의 신세대들에게로 이어졌다.
표현파나 인위적 설정의 작가에게도 문장의 척도란 없지 않은 것이며, 어느 수준에 이르렀다 할 때에야 기교나 수사의 효능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단편을 수십 편 쓰고 장편이 몇 권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작가요 문장가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니, 신진이라면 더욱 문장에 힘써야 할 것이다.
언젠가 필자는 술을 어지간히 많이 먹었다고 생각해서 그걸 교실 한 칸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었다. 지나고 보니 터무니없는 망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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