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중공)의 상징이었던 천안문 광장은 이날을 계기로 ‘반(反)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장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천안문 광장을 메우는 거대한 탱크에 맞섰던 한 청년의 모습은 여전히 세계인의 기억 속에 ‘탱크맨’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개혁개방정책과 경제부흥으로 어느 정도 국력을 확보해온 중국공산당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디지털전체주의’로 중국 내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숙청과 탄압을 계속해오고 있다.
문제는 중국공산당의 반(反)민주주의 행보는 3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020년 ‘제2의 천안문 사태’로 불렸던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서의 ‘홍콩법 반대’ 시위 또한 중국 공산당과 홍콩 경찰에 의해 유혈진압으로 마무리됐다. 당시 사건을 계기로 전 세계 여론은 하나 둘 중국에 등을 돌리고 있다. ‘더 이상 민주주의의 뿌리를 찾아볼 수 없는 인권불모지’라는 평가도 적지 않다.
32년 전, 민주화 갈망하는 수많은 청년들의 피로 적셔진 천안문광장
천안문 사태는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한 이후 급격한 정치경제적 변화에 의해 생긴 중국 인민의 민주화혁명으로 평가된다. 1966년 5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마우쩌둥은 ‘대약진운동’의 파멸적 결과를 감추기 위해 홍위병을 앞세운 유혈적 ‘문화대혁명’을 수행한다. 당시 수천만의 중국 인민이 처형당했다.
결국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은 내란으로 규정됐고 이어 집권한 덩샤오핑은 중국의 정치∙경제적 개혁개방을 추진했다. 1980년대 덩샤오핑 등 중국공산당 내의 개혁파들은 경제개혁과 함께 정치개혁을 주된 의제로 삼았다. 당시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 내 자신의 지지세력인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자신의 후계자로 보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후원했다.
그러나 후야오방은 1987년 1월 베이징에서 수천명의 학생 시위대와 공안이 충돌한 사건의 책임을 지고 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난다. 당시 겉으론 사태의 책임을 진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보수파 원로들의 견제에 의한 결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이후 자오쯔양이 당 총서기기직을 이어받는다.
여기서부터 ‘천안문 사태’의 발단이 시작된다. 후야오방은 그해 4월 중난하이에서 소집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회의에 참석했다가 갑작스런 심장쇼크로 4월 15일 타개했다. 대학생들과 근로자, 지식인들이 해임된 후야오방에 대한 평가를 공정하게 해줄 것을 요구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22일에는 장례식을 계기로 시안 등지에서 폭력사태까지 벌어졌다.
베이징의 대학생들도 후야오방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는 시위에 나섰고 이는 점차 더 적극적인 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로 발전했다. 중국공산당은 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를 통해 시위를 ‘반혁명 동란’이라는 프레임을 씌웠고 여기에 격분한 중국 국민은 급기야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 베이진 내 시위의 강도가 높아지자 전국 확산을 꺼린 중국공사당은 6월 4일 새벽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수천명의 시민들을 탱크로 깔아뭉개는 유혈진압을 감행했다. 이후 ‘천안문 사태’는 중국 내에서는 금기시 되다시피 한 사건으로 남게 됐다.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인 강량 정치학박사는 ‘천안문 사태’에 대해 “중국공산당은 개혁개방을 하면서도 경제발전이 중국 내 중산층을 만들고 그 확대로 인해 반체제적인 민주화운동이 나타날 것을 경계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결국 천안문 광장에서의 부패반대와 민주주의를 향한 자유의 외침을 유혈진압으로 대응하는 악수를 뒀다”며 “그들은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긴 것이다”고 강조했다.
‘제2의 천안문광장’ 전락한 홍콩…중국의 권력유지용 인권탄압은 ‘현재진행형’
천안문 사태의 불씨는 중국 내에서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역량이 부족한 탓에 더 큰 불길로 옮겨 붙지 못했다. 천안문 사태의 실패는 민주화세력에게 교훈을 남겼고 그들의 민주화 염원은 홍콩과 마카오로 거점을 이동한 조직적 네트워크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들의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해부터 홍콩에 대한 실효지배를 강제한 중국 정부는 중국과 홍콩을 분리시키거나 정부를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인 ‘홍콩 보안법’ 제정을 추진했다. 홍콩 내 수많은 지식인들과 일반 시민들이 거세게 저항했지만 총칼로 무장한 군과 경찰 앞에 무기력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당시 우 치웨이 민주당 대표를 비롯한 홍콩 내 다수의 민주화 인사들은 ‘일국양제의 죽음’이라고 비판했다.
홍콩보안법 시행을 기정사실화 한 중국 정부의 행보는 더욱 과격해졌다. 지난해 6월 4일 3000명의 전경을 투입해 천안문 사건 추모식을 진압했고 홍콩민주화인사들에 대한 축출에 나섰다. 홍콩은 또 다시 제 2의 천안문이 됐고 빅토리아 공원은 수많은 홍콩시민들의 피로 얼룩졌다. 그로부터 약 20여일 후인 7월 1일 중국은 홍콩 국가보안법(홍콩 보안법)을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당시 데니스 궉 시민당 의원은 “홍콩보안법 시행으로 일국양제는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이것은 홍콩의 끝을 시사한다”라고 규탄했다. 타냐 찬 의원도 중국이 홍콩 보안법 제정을 천명한 날을 “홍콩 역사상 가장 슬픈 날”이라고 규탄했다. 학생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조슈아 웡은 당시 트위터에 “무력과 공포로 홍콩인들의 비판적 목소리를 침묵시키려는 중국 중앙정부를 강력 비판한다”고 했다.
다수의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천안문 사태’와 ‘홍콩법 반대’ 등은 우리나라에도 여러 가지 시사점을 남긴다고 진단했다. 중국 정부가 민주주의를 극렬하게 저지해 결국 해당 세력의 뿌리가 뽑혔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한 우리나라와 결코 한 배를 타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강 박사는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민주국가들은 97년 중국에 홍콩을 반환하면서 50년 동안 ‘일국양제’를 하면 중국도 민주주의가 발전할 것이라는 착각을 했지만 결론적으로 중국에 민주화 영향을 주지 못했다”면서 “중국공산당은 치밀한 계획으로 홍콩 내에서의 민주화운동과 독립운동을 미리 대비했고 끝내는 민주홍콩을 진압하고 전체주의 국가를 만들고야 말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국공산당은 ‘천안문 사태’에서 유혈진압의 효과를 경험했고 홍콩에서도 이러한 방법으로 시민들과 청년학생들을 진압했다”면서 “2020년 당시 홍콩 내 반체제 인사들과 민주화운동가들은 목숨을 건 투쟁을 하다 위협을 받고 서방으로 빠져나가 현재 홍콩 내 저항세력은 거의 소멸됐다”고 주장했다.
성상훈 한미역사연구소 소장도 중국 민주주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홍콩 내에서 저항하던 사람들이 구금되거나 해외로 도피했기 때문에 홍콩도 완전히 중국에 먹혔다”면서 “중국은 홍콩문제를 중국문제로 만들었고 현재는 전쟁을 하지 않는 이상 홍콩 문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성 소장은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고 중국에서의 민주화세력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면서 “그나마 저항하는 조직들이 파륜궁이나 티벳, 남몽골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인데 이들은 민주화가 아닌 독립주의자들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만약 소수민족들의 독립이 가속화 된다면 모를까 현 시점에선 중국은 반민주화 체제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한대의 기자 / 시각이 다른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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