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결권 논의가 수면 위로 다시 떠올랐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가 도입 추진 의지를 밝히면서부터다. 복수의결권은 창업자가 보유한 주식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해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대다수 경제 선진국이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정부도 그동안 핵심 과제 중 하나로 복수의결권 도입을 추진했지만 ‘재벌특혜’라는 야당과 시민단체의 반대로 무력화되는 전철을 밟아왔다. 전문가들은 국내 유망 기업들이 해외로 유출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복수의결권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복수의결권, 미국·유럽 등 선진 시장서 적극 채택 기류
정치권에 따르면 인수위는 지난달 24일 중소벤처기업부 업무보고를 받은 뒤 벤처기업 복수의결권 도입을 추진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인수위는 “기존 중소기업 정책을 면밀히 검토해 불필요하거나 당초 취지에 맞지 않게 된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고 절감된 재원을 활용해 새로운 정책 및 사업 기획이 필요하다”며 “미래 신산업을 주도할 벤처·스타트업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복수의결권 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복수의결권은 대주주가 보유한 지분율 이상의 의결권을 행사하는 제도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사항중 하나다. 보통 1주당 1의결권을 원칙으로 삼지만 복수의결권을 허용하면 대주주에게는 1주에 10주 또는 100주 등 다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벤처기업이 투자금을 끌어모을 때 높은 지분율을 유지하고 적대적 M&A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복수의결권의 최대 강점이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상속세는 60%이기 때문에 대를 이어 100년 기업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면서 "상속세를 내기 위해서는 주식을 팔아야 하는데 그럴 경우 경영권까지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최 명예교수는 “이 때 복수의결권 주식을 갖고 있으면 의결권 하나하나가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되므로 상속세를 내더라도 경영권을 잃지 않게 된다”고 설명했다.
선진국들은 복수의결권을 적극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계부처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7곳이 복수의결권 제도를 도입했다. 미국 회사법에서는 주식 의결권 수에 대해 규제하지 않고 정관으로 복수의결권주식 발행을 허용한다. 일례로 구글 모회사인 알파벳은 A클래스 주식에 1주 1의결권을, B클래스 주식에는 1주 10의결권을 부여하고 있다. 이를 통해 구글 공동창업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불과 11.4% 지분율로 의결권 51.1%를 행사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덴마크, 프랑스, 아일랜드, 헝가리, 영국 등이 복수의결권을 허용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는 정관에서 배제하지 않는 한 2년 이상 동일인이 주주명부상 지위를 유지하면 자동적으로 2배 의결권을 부여한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복수의결권주식을 종류주식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단원(單元)주제도’를 통해 복수의결권과 동일한 효과를 끌어낸다. 단원주제도란 일정수의 주식을 하나의 단원으로 해 하나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벤처창업 붐이 일어나고 있는 신흥국에서도 복수의결권을 허용하는 추세다. 홍콩은 알리바바 등 중국 거대 IT기업을 유치하는데 실패하자 2018년 복수의결권을 도입했다. 중국도 바이두, 알리바바, 징둥 등 중국 IT기업들이 미국 증시에 상장하자 복수의결권 등록방식에 기반한 커촹반(STAR Market)을 개설하고 2019년부터 거래를 시작했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유니콘기업을 보유한 인도 역시 2019년 기술기업에 복수의결권 발행을 허용한 바 있다.
韓 벤처기업 56% “투자 발생 시 지분희석 우려”
한국도 뒤늦게나마 복수의결권을 추진하고 있지만 그동안 정치논리에 휘둘리며 사실상 무력화된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창업주에 한해 의결권을 주당 10개까지 허용하는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벤처기업법) 개정안’을 의결했지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에서 가로막히고 말았다. 민주당 소속 법사위원은 재벌 대기업의 편법 경영권 승계로 악용될 수 있고 소액주주를 보호하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를 앞세워 법안 처리를 반대했다.
복수의결권은 민주당의 20대 총선 공약이자 2020년 정부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에 포함된 핵심 정책이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작년 8월 ‘K애드벤처(제2벤처붐 성과와 미래)’ 행사에서 복수의결권 도입을 국회에 촉구하며 긍정적인 뜻을 전했다. 다만 이재명 민주당 상임고문 체제로 전환되는 민주당 상황을 고려하면 비관적 전망도 나온다. 이 상임고문은 20대 대선 과정에서 복수의결권에 대해 이렇다 할 입장을 밝힌 것이 없다. 다만 이재명캠프에서 활동한 박용진·이용우·오기형 등 민주당 의원들은 복수의결권 도입에 대해 반대 입장을 제기한 바 있다.
업계는 복수의결권 도입을 염원한다. 벤처기업협회 설문조사에 따르면 벤처기업의 88%가 복수의결권 주식 도입을 희망하고 벤처캐피탈도 66%가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러났다. 또한 벤처기업의 56%는 투자 발생 시 지분희석을 우려했다. 이로 인해 △투자유치 규모 축소 43% △투자유치 포기 7% △대응방법 없다 39% 등을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벤처기업협회, 코리아스타트업포럼, 한국벤처캐피탈협회 등은 최근 성명서에서 “창업주 마음대로 복수의결권을 발행할 수 없고 복수의결권 주식이 상속·양도되거나 창업주가 이사직에서 사임할 경우 자동으로 보통주로 전환된다”면서 “이런 안전장치가 있는 데도 아직 발생하지 않은 가능성만으로 벤처업계의 염원이 묵살되는 것이 유감스럽다”며 제도 도입을 촉구했다.
복수의결권을 도입하지 않을 경우 국내기업들이 해외 증권시장으로 대거 상장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 따르면 뉴욕증권거래소·나스닥·도쿄증권거래소·상해증권거래소·홍콩증권거래소 등 글로벌 5대 증권시장은 복수의결권을 도입한 기업의 상장을 허용하고 있다. 지난해 IT기업 쿠팡이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한 것도 복수의결권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당시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은 1주당 29배에 달하는 의결권을 부여받은 바 있다.
유환익 전경련 기업정책실장은 “자본시장이 완전 개방된 상태에서 자칫하면 국내 유수기업들이 잇따라 해외에 직상장할 위험성이 매우 높다”며 “차등의결권 제도를 전면 허용해 개별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서는 자본시장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이석 시장경제제도연구소장도 “유망한 스타트업 업종일수록 자금 유치는 쉽게 할 수 있지만 경영권을 뺏길 위험도 크다"면서 "복수의결권은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소장은 특히 “쿠팡이 미국에서 상장한 것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복수의결권을 고려했을 것"이라며 "많은 기업들이 국내 증시에 상장하도록 유인하기 위해서라도 복수의결권 도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복수의결권 도입 자체를 반대하거나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연초에 성명서를 통해 “복수의결권주식 허용을 골자로 하는 벤처기업법 개정안은 상법상 1주 1의결권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비상장 벤처기업을 유니콘 기업으로 육성하는 것과도 무관하다”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경실련 등에 따르면 비상장기업은 복수의결권 주식발행 없이도 주주 간 사적 계약으로 창업자와 투자자의 지배권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에 복수의결권 주식발행으로 창업자의 경영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지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또한 벤처기업의 한해 복수의결권이 적용된다고 해도 이후 일몰조항(발행 후 10년, 상장 후 3년)이 삭제되면 대기업도 복수의결권 주식을 발행하는 것이 되므로 재벌기업 등에도 복수의결권 주식을 허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누구를 위한 복수의결권 주식 도입인가?’라는 보고서를 통해 "비상장 벤처기업에 복수의결권 주식 발행을 허용하는 것은 유니콘 기업 육성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이어 "법안에 재벌 세습에 악용될 수 없도록 제도적 장치가 돼 있다고 하지만 향후 벤처기업 육성을 핑계로 이를 완화하는 것은 복수의결권 제도를 도입하는 것보다 훨씬 용이한 일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예를 들어 벤처기업은 중소기업이어야 한다는 조항만 삭제하면 그만이다"라면서 "설령 이러한 추가적 법 개정이 당장 이뤄지지 않더라도 복수의결권 도입으로 편법승계의 통로가 확보된 이상 마지막 장애물을 허물어뜨리려는 시도는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특히 “결국 비상장 벤처기업에 복수의결권 주식을 허용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재벌왕국으로 만드는 첫 걸음이 될 뿐”이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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