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불평등·반칙 등으로 대한민국은 청년이 병들어가는 사회가 됐다. 한때 청년들에게 위로가 되었던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 저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이제 “아프면 청춘이 아니라 환자다”라는 웃지 못할 반박도 따라온다. 이제 어쩌면 코로나19는 청년의 아픔을 덮는 좋은 ‘핑곗거리’일지도 모른다.
폭우에 잠겼던 힘든 어린 시절… ‘무소의 뿔’처럼 전진하다
작금의 현실은 자신의 상상과 창의를 현실의 것으로 창조해내는 예술가에겐 더 가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청년 예술가들에게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을 제공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꿈도 펼쳐 나아가는 이십대 청년이 있다. 사진작가로 활동 중인 김동준이 외양간 스튜디오 대표(25)다. 스카이데일리는 어려운 현실에도 자신의 꿈에 다가가는 김 대표를 만나러 스튜디오를 찾았다. 우선 사진작가를 시작한 계기를 물었다.
“원래 저는 19살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연기를 했어요. 연기자들은 보통 자신의 프로필 사진을 찍는데 그때 동료 연기자들이 촬영을 하고 오면 대부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서 사진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더라고요. 촬영 비용이 꽤 비싼데 말이죠. 그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내가 찍어주자’란 생각이 들어 카메라를 처음 들었어요. 제가 걷고 있는 사진이란 길의 출발점은 지인들로부터 시작한 셈이죠.”
김 대표는 사진작가의 출발선이 연기자인 지인들의 사진 찍어주기였다고 밝혔다. 실제로 외양간 스튜디오에는 이곳에서 촬영한 듯 보이는 모델이나 배우의 사진이 많았다. 그는 자신이 마음먹었던 일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스튜디오들이 외국어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왜 하필 ‘외양간’이란 단어를 스튜디오의 이름으로 정했는지 궁금했다.
“제가 97년 소띠예요. 그래서 소가 외양간에 있듯 나도 그렇지 않겠나 하는 뜻으로 무심결에 뱉은 이름인데 의외로 느낌이 괜찮더라고요. 특히 많은 스튜디오가 외래어나 숫자를 섞어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보단 정겹고 포근한 어감의 이름이 좋았어요. 많은 사람이 편하게 왕래하고 놀러올 수 있는 북적이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죠.”
젊은 나이에 한 사업장의 대표가 된 그는 인터뷰를 이어가면서도 긴장한 기색 없이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펼쳤다. 기자가 김 대표의 나이 땐 그저 철부지였던 기억이 떠올라 자연스레 비교가 됐다. 이런 김 대표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어린 시절 힘든 일을 겪었다고 말했다.
“중학생이었던 10년 전 쯤, 가구회사를 다니시던 아버지가 가구 사업을 따로 시작하신다고 회사를 그만두셨어요. 가구회사에 다니셔서 어느 정도 노하우를 갖고 계셨던 거죠. 이후 사업장을 계약하고, 판매할 제품들도 들여놓고, 최종판매 목록이 게재된 카탈로그까지 나오면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어요.”
“그런데 회사가 물에 잠기게 된 거예요. 아버지 회사가 부천 내동에 있었는데 그 인근에 하천이 하나 있어요. 사업을 시작하려고 한 바로 그날 비가 억수같이 내렸어요. 그래서 아버지 회사뿐만 아니라 인근 사업장, 공장이 물에 다 잠겼죠. 이 때문에 아버지는 사업을 제대로 시작도 못해보시고 수억원의 빚을 지게 되셨고요. 모아두셨던 자산, 집, 회사까지 모두 사라졌죠. 다행히 지금은 아버지께서 이전에 다니시던 회사로 복직하셨어요. 빚도 갚아나가고 있죠.”
“부모님께서 많이 힘드셨을 텐데도 저를 부족함 없이 키워주셨어요. 아버지께서 대단하신 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술 한 방울 드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이에요. 다만, 아버지의 눈물을 그때 처음 봤어요. 아버지는 제게 슈퍼맨 같은 존재였어서 적잖은 충격이었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아버지와 대화할 때는 당신의 눈을 못보겠더라고요. 그럼에도 여전히 존경하는 멋진 분이세요.”
기상청에 따르면 2011년 7월 26~27일 경기 부천지역에 162mm의 폭우가 내려 경인고속도로 부천 내동 나들목 주변, 원미구 등의 도로와 주택, 공장 등 총 85곳이 침수됐다.
이런 수해(水害)가 어린 나이의 김 대표와 그의 가정을 한바탕 할퀴고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소의 뿔처럼 정진해 좌절하지 않고 천천히 자신의 길을 모색했고, 지금은 공유 오피스 겸 사업장인 외양간 스튜디오를 만들어 다양한 청년 예술가를 품에 안고 있다. 김 대표에게 이 같은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물었다.
“처음 외양간 스튜디오는 기타를 치는 친구와 시작했어요. 저는 이곳에서 촬영을 하고, 친구는 레슨을 할 계획이었지만 생각처럼 잘 안 됐죠. 그래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고, 이 스튜디오는 제가 맡게 됐어요. 비록 반지하지만 공간이 넓어 어떤 일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고, 혼자 있으면 외롭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사람이 북적거리는 공간이 되는 외양간이란 이름을 지었던 처음 뜻대로 공간을 공유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다이아몬드의 원석이 찾는 또 다른 원석들… “자신이 브랜드가 되길 꿈꾸며”
실제로 외양간 스튜디오에는 프로필·콘셉트 촬영 공간, 웨딩업계 관련 종사자, 가죽·금속공예 개인사업자 등 다양한 사람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꿈을 펼치고 있었다. 젊은 감성이 물씬 풍기는 이곳은 요즘 말로 ‘힙(Hip)’한 느낌 그 자체인 듯 했다. 하지만 금전적인 부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만큼 기자는 김 대표에게 개인마다 월 공유 비용이 얼마인지 물었고, 돌아온 그의 대답을 듣고서는 ‘자선사업’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당장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예술가들이나 자신만의 작업실을 찾는 데 벽에 부딪혀 꿈을 펼치지 못하는 이들을 모았어요. 그래서 월 10만원으로 개인 작업 공간을 임대해 지금은 아티스트 개인의 다양한 꿈들과 교류하고 있죠. 공유로 수익을 내려는 목적이 아니라 한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얽히고설키는 게 제가 원했던 방향이었으니까요.”
“초기 비용은 제가 모두 처리했어요. 제가 군대를 산업체 전형으로 나와서 복무 당시에 일반 회사를 다녔기 때문에 돈을 모을 여유가 조금은 있었어요. 1년 반 정도 일을 하면서 적금도 넣고 착실히 모았던 게 외양간 스튜디오란 공간과 마주할 수 있게 된 밑거름이 됐죠.”
이달 초 잠깐 만났던 김 대표와 당시 방문했던 외양간 스튜디오는 작업자들 간의 꿈을 펼치는 공간이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그만큼 김 대표의 주변엔 사람이 많았고, 그는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듯 보였다. 그에게 사람이란 어떤 의미인지 설명을 부탁했다.
“사람이란 제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미예요. 특히 ‘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보다 좋은 삶이라는 게 제가 가진 인적 철학인 것 같아요. 인연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그리 거창할 게 없는 것 같아요. 그저 생각나면 뜬금없이 연락을 남기거나 사소한 안부라도 ‘먼저’ 묻고 다가가는 거죠.”
“반면, 간혹 인연을 자신의 이익과 맞춰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어요.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고 뜬금없는 소식이 전해지는 것도 좋지만 관계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죠. 저는 그렇게 느껴지는 사람과는 다시 관계를 이어가지 않아요. 즉, 인연을 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대로 잘 끊는 것도 중요하죠. 상대방에 대한 고마움이나 소중함이 관계의 우열과 상대에 대한 권리로 변질되는 것은 차단해야 하니까요.”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고 인연의 끈을 먼저 이으려는 그의 대인관계에 대한 자세는 기자 생활에서도 중요하다. 취재원과 기자의 돈독한 관계가 좋은 정보를 가져오고, 이 정보들은 곧 양질의 기사와 직결돼서다. 그래서 항상 기자도 대인관계를 고민한다. 김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어려운 대인관계에서도 뚜렷한 자신만의 철학을 가진 그였다. 이윽고 그의 본분인 사진에 대해 어떤 마음으로 셔터를 누르는지 물었다.
“사진 속에 제가 담고자 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만 나타낼 수 있는 대상의 자연스러움이에요. 그래서 촬영을 할 때도 일상적이고 현재의 느낌을 이끌어내는 대화를 많이 하죠. 멋있고 예쁜 상태로 촬영하는 정돈된 사진도 좋지만 사진의 대상이 일상에서 대화를 할 때 나오는 표정들, 즉 다이아몬드로 치면 제련된 완성품이 아닌 원석 그대로의 모습을 담고자 해요.”
거울을 보고 대화하지 않는 이상 자신의 평소 표정이나 표정에 담긴 습관은 알기 어렵다. 따라서 김 대표는 촬영대상 본인이 쉽게 알기 힘든 모습을 사진 속에 담는 찰나의 미학을 담는 과정도 중요하다고 했다. 남다른 철학을 가진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이 무엇인지 물었다.
“제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말이 있는데 그건 상대가 제게 ‘그게 되겠니’ ‘어려울 걸’ 등 비관적인 말들을 할 때예요. 하지만 저는 저를 예단하는 그 예상을 보란 듯 타파하고서 그 말을 했던 상대의 놀란 표정을 보는 것에 더 큰 자신감을 얻죠. 5년 전 국토대장정을 홀로 나서기 전에도 그랬고, 지금 사업도 그랬죠. 하지만 이뤘고, 이뤄내고 있는 중이에요.”
‘말을 많이 하는 사람보다 많은 질문을 받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말이 있다. 김 대표는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질문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는 이겨왔고, 이기는 중이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던 그의 눈은 맑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끝으로 그가 나아갈 미래가 궁금해지면서 그가 가진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제가 가진 목표 중 하나는 먼저, ‘질문 받는 사람이 되자’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선 다양한 경험이 바탕 돼야 하죠. 다시 말해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다음으로는 제 주변사람들에게 있어 제가 큰 인맥이 되고 싶고요.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좋아서죠. 끝으로는 제 자신이 브랜드가 되는 거예요. 이런 목표가 있어 힘을 낼 수 있어요.”
인터뷰를 마치며 기자는 김 대표의 강점을 세 가지로 꼽았다. 우선 젊은 나이에 스튜디오 대표와 사진작가라는 타이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 다음으론 사람과의 인연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확실한 맺고 끊음. 끝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아갔던 삶의 경험과 현재의 직위를 내세우지 않는 소탈한 인성. 이런 점들이 그의 현위치를 설명해줬다. 어쩌면 다이아몬드의 원석을 만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김찬주 기자 / 시각이 다른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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