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여리한 외모와 달리 놀라운 열정으로 한국 불교미술의 새 지평을 열고 있는 홍나연 미술작가. 홍 작가는 특이한 이력의 주인공이다.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한 뒤 외국항공사의 스튜어디스로 일하다가 다시 대학에 입학해 불교회화를 전공했다.
최근 불교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홍 작가는 오랫동안 연구한 진영(고승의 초상화)의 창작 복원 과정을 논문으로 정리하는 중이다. 2월에는 경기도 파주에 ‘홍나연 불교미술문화연구소’를 열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불교사상’ ‘전통 채색화’ 강의를 준비하고 있다.
홍 작가는 수많은 팔로워를 거느린 페이스북계의 인싸다. 불교미술 작가로 활동하면서 시작했던 페이스북 활동이 어느덧 10년째로 접어들었다. SNS ‘인싸’가 된 비결이 있을까.
비인기 장르 선택에 잇단 응원
“나의 본령인 ‘불교미술’ ‘불교철학’이라는 게 대중적으로 호응을 얻기가 쉽지 않다. 또 성격상 타인에게 무엇을 바라는 기대치가 낮다 보니 SNS를 통해 내 작업을 홍보하겠다는 욕심도 없다. 그저 한 사람으로 현재를 살아가며 느끼는 생각과 작업 과정을 담담하게 기록한 것이 전부다”라고 홍 작가는 말한다.
심지어 자신의 글이나 사진에 ‘좋아요’나 댓글이 달려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고 한다. 혼자서 작업, 전시, 연구, 생활을 감당하느라 여러 가지로 여유가 없는 탓이다. 그래서 홍 작가는 꾸준한 응원과 격려를 보내는 분들에게 마음의 빚이 적지 않다. 자신의 게시물이 불교라는 종교성이 강함에도 자비로운 인연을 이어가는 다른 종교인들에게 특히 감사한 마음이다.
불교미술은 일반 회화와 달리 마음을 닦는 수행의 방편이자 끝없는 노력과 정진의 결실이다. 챗GPT, 인공지능(AI) 시대에 도 닦는 불교미술을 한다고 하면 고리타분하게 들리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아니 바로 그래서 사람들은 오히려 이 진지하고 낯선 분야에 올인하는 그의 모습에 감동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측은지심’ ‘보리심’이 아니겠는가.
홍 작가는 자신으로 인해 사람들이 불교·미술·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고, 사찰도 직접 찾아가게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여객기 사고 트라우마로 모든 것 접어
홍 작가는 대학에서 고미술학을 전공한 후 엉뚱하게 외항사 스튜어디스로 근무했다. 사실 겉으로만 보면 고미술보다는 스튜어디스가 더 어울리는 외모다. 늘씬한 키에 서구적인 마스크는 여객기 안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예쁜 승무원 바로 그 자체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런 굴곡진 삶을 살게 된 걸까?
“1990년 이콘화와 서양화 복원을 배우기 위해 유럽으로 날아갔다. 유럽 물가가 워낙 비싸다 보니 일과 공부를 병행해야 했다.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오스트리아 라우다 항공사 승무원 모집 공고가 나서 취업하게 되었다. 그런데 근무한 지 1년도 되지 않았을 때 그 일이 일어났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1991년 5월 26일 홍콩을 출발한 라우다 항공사의 보잉 767 여객기, 별명 ‘모차르트’는 방콕을 경유해 최종 목적지인 빈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방콕의 돈 무앙 공항을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태국의 정글 지대로 추락했다. 그 바람에 승무원을 포함한 탑승객 223명 전원이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여객기가 추락한 해인 1991년은 모차르트 서거 200주년이었다.
“그 여객기에 내가 타기로 되어 있었다. 그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왠지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그렇게 큰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단지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동료 승무원에게 근무를 대신 서달라고 부탁한 뒤 방콕에서 빈으로 가지 않고 한국행 비행기로 갈아 탔다.”
그런데 김포공항에 도착한 순간 그는 놀라운 뉴스를 접하고 만다. 그가 타기로 된 ‘모차르트’가 갑작스러운 역추진 장치 작동으로 추락한 것이다. 산산이 부서진 기체를 눈으로 확인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당시 공개된 승무원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어 어머니도 딸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동료들은 그를 ‘럭키 컬’이라고 추어올렸지만 동양인 대신 자기네 승무원이 희생당했으니 눈길이 고울 리가 없었다. 트라우마로 몸과 마음을 다친 그는 휴가를 내고 경주 고향집으로 향했다.
고승 초상화 그리며 용기 얻어
고향집 서재에 낡은 수월관음도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전에는 고리타분하기만 했던 그림이 바라볼수록 따뜻함과 편안함을 주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어머니가 정성껏 차려준 따뜻한 밥과 된장국으로 기력을 회복했지만 일터로 돌아가는 것은 포기했다. 그리고 불교에 귀의했다.
“그 사건으로, 어린 나이에 삶과 죽음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인간에게는 생사의 결정권이 없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너무나 무력한 존재였다”고 홍 작가는 말한다.
그는 지금 스무 살 초반에 뜻을 두었던 서양화 복원이 아닌, 불보살과 수행자를 그리는 불모가 되었다. 홍 작가는 수행을 한 고승들의 초상을 그리며 자신의 고통도 피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태어남과 죽음을 신의 섭리와 뜻이라기보다 연기로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20대 초반 삶과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적나라하게 마주하는 시간들이 없었다면 현재의 나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여전히 생겨나고 소멸하는 중이다. 그것을 잊고 과거에 집착하여 괴로워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새로 생겨난 ‘나’이니 현재의 나에 집중하는 것이 나의 최선일 것이다.
미래의 계획이 있냐는 물음에 “우선 올해 개소한 연구소의 기반을 다지면서 새로운 테마로 작업할 계획이다. 테마는 아직은 밝히기 조심스럽고 아마도 늘 그랬듯 시간이 지나면 독백하듯 SNS로 인사를 드릴 것 같다. 소식만 올리고 댓글 없이 사라져도 너무 미워 마시고 ‘아, 잘 버티고 있구나!’ 너그럽게 이해를 해주시면 좋겠다”고 마무리를 지었다.
인생은 너무나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이다. 삶에 대한 정답은 없다. 다만 홍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 “나를 잘 건사해서 타인에게 피해주지 않고, 좋은 것은 나누면서 살다 가는 것” 그것이 인간으로 사는 가장 큰 미덕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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