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로 작업하는 작가가 최근 들어 많아졌다. 역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모색 끝에 도입되기 시작한 종이가 보편적 매재로 정착되고 있는 느낌이다. 게다가 현대미술의 딜레마 속에서 평면성과 입체성 양쪽 모두에 활용도가 높은 전천후 매재로 각광받고 있다.
종이를 매재로 사용하는 작가의 십중팔구가 한지를 사용하고 있다. 반제품 원료를 조형적으로 사역하기 수월하고 내구성이 좋다는 점 등 이유는 다양하다. 그 작가들 가운데 조금 특이한 케이스가 있다. 바로 전태원(71)이다. 방법적으로는 분명히 종이 작업인데, 한지의 물성적 탐구와는 거리를 두고 있으며, 그의 종이는 이미 한 번 문서나 도서로 ‘용도가 종료된’(secondhand) 종이, 즉 오브제인 것이다. 아동미술에서 신문지를 물에 풀어 조형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생각하면 되겠다. 하지만 단순한 폐지 활용 차원과 작가의 ‘텍스트 이후’라는 모티브 사이에는 커다란 의미론적 차이가 있다.
작가의 ‘텍스트 이후’, 즉 종이 반죽 추출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창조적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부를 수 있다. 그의 창조는 무수히 많은 책장이나 문서를 세절기로 잘게 분쇄시키는 퍼포먼스와 제스추어로부터 시작된다. 기존의 텍스트나 컨텐츠들이 무자비하게 난도질되어 사라지니 해체나 재구성보다 더욱 철저한 부정의 테제가 작동된다 할 수 있다. 전자가 체계의 물리적 변화를 촉발시키는 것이라면 후자는 화학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에 가깝다. 딱히 종이에 실린 텍스트나 컨텐츠 등의 메시지를 따지지는 않는다. 인류 문명의 배경이 되는 로고스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반역 혹은 저항으로 읽힐 수도 있다. 물론 작가 입장에서 그러한 비약까지는 의도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그 제스추어의 의미와 의의의 여부는 독자의 몫일 뿐이다.
작가는 초기에 이렇듯 분쇄된 알갱이들을 이용하여 인물 표현을 시도했다. 워낙 모델링이 출중하다 보니 평범한 페인팅보다 더 감각적인 형상성을 구현하기도 했다. 분쇄된 인쇄 입자들을 조합해 얼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인고의 프로세스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획기적 회화 장치인 것은 분명하다. 역시 보는 사람들, 독자들에겐 범상치 않은 텍스트로 받아들여진다. 멀리서 보면 다소 상기된 노인을 표현한 정밀한 인물화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입자들이 모여 이룬 그림자 같은 것으로 보인다. 동시대인들이 짊어지고 있는 실존적 상황 같은 것들이 독해될 수 있다. 물론 서정적인 그리기와 실존적인 표현이라는 다양한 독해항(項)을 우리에게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가볍게 향유할 수 있는 이미지이면서도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방법과 장치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분쇄 제스추어 이후 작가는 순수한 것이든 혹은 도구적인 것이든 문명의 편린들을 장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 매몰시키고 있다. 모든 텍스트가 그저 하나의 물질 덩어리로 한원되어야 하는 유물론자(?)의 시각이 살짝 엿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수없이 많은 텍스트가 용해된 그 물질을 새로운 텍스트로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 문명의 부산물인 텍스트들이 장렬하게 산화하여 모래알이나 흙 입자 같은 이미지로 환원되어 세월의 흐름 속에 던져진 대상으로 재정립된다. 그 시작과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영겁의 시간을 머금은 대상 혹은 세계로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2차원(엄밀히는 3차원이지만)의 회화적인 작업에서는 ‘결’이라는 현상으로, 그리고 입체 양식의 경우엔 바위라는 ‘유사 오브제’를 생성시키고 있다.
전자의 회화적 도상들은 무수한 입자들이 응집되지 못한 채 시간 속에서 주어지는 물리적 자극에 순응해 어떤 파동이나 ‘결’로 나타난다. 썰물 후 나타나는 갯벌의 물결 흔적, 혹은 사막에서 바람이 연출한 주름 등과도 유사하다. 어제도 있었고 또 내일도 있게 될 의구한 자연의 현상이자 모습이기도 하다. 여기서도 작가가 이전에 선보였던 인물 이미지와 비슷한 유형의 반응을 예상케 한다. ‘결’ 이미지가 가진 형이상학적 메시지보다는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감성적 효과가 선행된다는 점에서다. 정적이면서도 어떤 생태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리고 빛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유발되는 감흥이 강렬하기에 다른 의미론적 컨텐츠들이 희석되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작가의 입체적 작업은 회화 양식과는 또 다른 감흥을 자아낸다. 작가가 2018년에 이상원미술관에서 가진 초대전에서 선보인 입체 설치는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압권이었다. 거대한 바위들이 허공에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 드러나는 일루전은 ‘친숙함의 낯섦’이 아닐 수 없다. 화이트큐브의 전시 공간에 바위라는 이미지가 등장한 것이 그렇고, 또 부분적으로 마술처럼 허공에 떠 있음이 그렇다. 너무도 생생한 하이퍼리얼의 재현과 연출이 강렬하여 여기서도 종이 분쇄의 제스추어가 깔아 놓은 담론의 복선이 오히려 희석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현하는 이미지나 양식은 다르지만, 방법 면에서는 박수근의 마티에르와 통하는 바가 있다. 우리 주변에 흔한 화강암을 감각적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작가 작업의 긍정적 부분은 역시 담론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도식적이거나 설명적으로 전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문명이라는 주제는 ‘거대 서사’에 가깝다. 그런 만큼 독자들에게 은밀하고 자연스럽게 호소하기보다는, 시종일관 훈장질하거나 자기 인식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식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작가의 종이 작업은 그런 우려를 차단하고 있다. 그의 작업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다. 작가의 작업은 과거 인물화든, 결 패턴의 그림이든, 혹은 바위 이미지 재현의 입체든 일정한 접근 양식을 지니고 있다. 먼저 1차적인 기술적(記述的) 측면에서 감각적으로 자연스럽게 밀착한다. 그러고 난 후 2차적인 단계, 즉 해석적 국면에 접어들어서는 개념적이기 쉬운 ‘큰 이야기’ 혹은 이지적 주제들을 무리 없이 관조하고 음미하도록 유도한다. 요컨대 편하고 쉽게 접근하도록 하면서도 주요 키워드를 점진적으로 각인시키는 노련미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관객이 1차적인 향유 단계에만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모든 예술적 텍스트는 저자를 떠나는 순간, 독해 자체가 독자의 권리이자 몫이기 때문이다. 썰물 이후 남는 파상 흔적을 표현한 그의 그림이 의미가 닫힌 추상으로 읽혔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존중되어야 한다. 어떤 기억들을 환기시키는 미미한 효과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상당한 의의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교감이나 상호작용 자체가 열매 아니겠는가. 복잡한 과정들을 통해 창조된 작가의 종이 작업 전반에 대해 보다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분석과 해석 작업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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