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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문의 영화세상] ‘쓸모 있는 바보’들의 사회
조희문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2-15 10:33:42
 
▲ 조희문 영화평론가·前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유용한 바보(useful idiot(s)) 또는 useful fool(s))는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원인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가리킨다. 특정 세력의 수괴나 그를 둘러싼 인너서클이 조종하는대로 움직이면서도 자신은 옳은 일을 하고 있고 정의를 지킨다고 자부까지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유용한 바보들이 넘치도록 믾았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우두머리가 불법적이거나 상식에 어긋나는 일을 할 때는 모르는 척, 안본 척 침묵하다가 반대편이라고 생각하면 벌 떼처럼 쏟아져 나온다.
 
멀리는 제주 4.3 사건에 연루된 제주 도민들이 그렇고 여수·순천 반란 사건에 가담한 군인들 또한 그렇다. 일부는 무고하게 희생된 경우도 있지만 남로당의 속셈이 뭔지도 모르는 채 가담한 아마추어 열사들이 더 많았다고 본다.
 
1985년 제6차 영화법 개정으로 수입자유화 조치가 이루어지고 외국영화 영화사들이 국내에 법인을 세워 영화를 직접 배급(직배)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부터 시작된 미국영화 직배는 한국영화 시장에 큰 충격을 주었다. 같은 해에 UIP코리아라는 외국계 회사가 설립됐고 뒤를 이어 20세기 폭스 코리아도 등장했다.
 
이 무렵을 전후해 수많은 영화인들이 ‘직배반대’와 ‘스크린쿼터 사수’를 외치기 시작하며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몇몇 영화인들이 삭발 퍼포먼스를 하거나 배우 최민식이 문화부에 훈장증을 반납하는 소동을 벌인 것도 스크린쿼터 축소(또는 폐지)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당시 영화인들의 염원은 스크린쿼타가 한국영화 보호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순박한 믿음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이 운동을 기획한 몇몇 지도부에서는 미국과의 협상이나 스크린쿼터 무력화 계획을 논의하고 있었다. 운동의 성격도 한국영화 보호 주장에서 차츰 제국주의적 미국문화를 규탄한다는 식으로 변질하면서 반미운동의 수단으로 둔갑했다. 현장에 나선 영화인들은 이런 내막을 알지 못한 채 ‘스크린쿼터를 하루라도 줄여서는 안된다’며 연좌시위와 피켓시위를 이어갔다. 한때 국내 영화계는 삭발파와 비삭발파로 나뉘어졌는데, 삭발파는 한국영화의 보호를 주장하는 애국영화인, 비삭발파는 영화시장을 미국에 내주어도 상관없다는 미국의 앞잡이라 불리며 극단적 이분현상이 일상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스크린쿼터는 영화인들의 아우성에도 연간 73일로 축소되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창동 문화부 장관이 재임하던 시절이었다. 영화인들은 심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만 더 이상의 반발은 흐지부지 가라앉고 말았다. 이후 한국영화는 외형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바뀌어 성장했지만 지금까지 시위에 앞장섰던 어느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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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유력하던 이회창 후보는 막판 아들 병력비리 추문이 터지면서 대권을 잡지 못했다. 이 사건은 김대업이라는 희대의 사기꾼이 벌인 공작이었고 언론과 여론은 진위 여부를 규명하기도 전에 냄비처럼 끓으며 이회창 후보를 비난했고 결국 선거가 끝난 뒤에 제보가 허위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선거결과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것이 김대업과 작전팀의 음모였는지, 상대 후보의 선거 캠프까지 연루된 공작이었는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대권의 향방이 달라진 것은 분명했다. 이 후보 입장에서는 대권을 탈취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상대는 부정한 방법을 이용하여 가로챈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도 여론은 병력비리 시건을 명백한 사실처럼 단정지었고 언론도 차분히 규명하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언론이나 여론은 김대업의 공작을 지지해준 꼴이었다. 사실이 드러나고도 누구도 사죄하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 재직 당시의 광우병 쇠고기 괴담은 한국 사회를 흔들었다. 광우병과 관련된 MBC의 조작 방송에 흥분한 시위대는 방송 내용이 허위인지 아닌지 가릴 새도 없이 시위 현장에 가담했다. 정권을 흔들려는 세력의 계획은 이루어졌고 사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시위 현장에 나간 무지한 인파는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믿었지만 들러리 깨춤을 추고 만 셈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 광화문 광장에 몰려나와 춤추고 노래까지 난장판을 벌였던 군중 또한 다를 바 없었다. 탄핵 직전 박근혜 대통령에게 쏟아진 각종 의혹과 괴담은 사실처럼 왜곡되어 퍼져나갔다. 박 대통령과 가까웠던 최서원 씨는 모든 사건의 배후 조종자인 것처럼 매도되었지만 구체적으로 실체가 드러난 일은 거의 없다. 비밀의 단서가 모두 담겨 있다고 알려진 태블릿PC는 재판 과정에서 증거로도 쓰이지 않았고 오로지 흥분한 여론과 설만 가득했을 뿐이다.
 
이번 계엄령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기도 전에 ‘내란’이니 ‘불법’이니 하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저 미운 상대를 쓰러트릴 수만 있다면 법이나 절차는 아무 상관없고 여론을 선동할 수만 있다면 가짜 뉴스·거짓말을 해도 좋다는 식의 무법이 횡행할 뿐이다. 모든 것이 불법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규명하는 것은 법이어야 하는데도 떠돌아다니는 것은 광분하는 집단의 극악한 목소리가 전부다.
 
탄핵 이후에 닥칠 세상을 예견하지 못한 채 무조건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국회의원들, 특히 여당이면서 야당의 몰이에 동조하려는 의원들, 사법 절차를 무력화하려는 의도가 명백한데도 장단을 맞춰주는 재판부 등도 결국 이 사회를 흔들고 권력까지 차지하겠다는 세력에게 동조하는 꼴이다. ‘유용한 바보’는 우리 사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셈이다.
 
잘못된 여론에 한 두 번은 휘둘릴 수 있다 해도 자신의 행동이 사리에 맞는 것인지 아닌지를 되돌아보는 것은 민주 사회를 사는 시민의 책무다. 불법과 선동이 넘치는 대한민국을 만들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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