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난민인권연합’은 북한 정권의 억압과 인권유린 등으로 자유를 찾아 한국에 온 탈북민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탈북민들의 인권 현실은 처참한 편이죠. 사실 그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선 많은 관심이 필요하죠. 앞으로 저뿐만 아니라 저희 단체는 탈북민들이 남한 사회에 안정적인 정착을 할 수 있도록 적극 나설 거예요.”
탈북난민인권연합은 북한에서 자유를 찾아 탈북한 동포들을 도우며 한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을 하는 데 적극 앞장서고 있는 단체다. 대표적인 활동으로 해상을 통해 페트병에 쌀을 가득 담아 북한주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있다. 이는 식량난에 시달리는 주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현 정권이 들어선 뒤 현재는 활동이 아예 중단됐다.
아울러 중국이나 제3국에서 방황하고 있는 탈북민들이 자유 대한민국에서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구출 운동을 전개한다. 이밖에도 암담한 북한의 실상을 국내와 국제사회에 알리는 등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김용화 탈북난민인권연합 회장(69)이 있다. 스카이데일리는 ‘탈북민들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김 회장을 만나 그의 영화 같은 탈북 이야기와 여러 가지 활동 내용을 들어봤다.
열차 전복사고로 사형선고까지 받아… 자살 시도하려 했지만 ‘삶의 희망’ 느껴
김 회장은 1953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김 회장은 1970년도에 황해남도 해주 4군단 사령관 대기차 운전기장을 맡았고 1988년도엔 2호 군수 열차 철도국 지도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던 어느날, 열차가 전복되는 사고로 인해 북한 당국으로부터 사형선고를 언도받았다.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그때가 정확히 1988년 7월13일이었어요. 당시 저는 2호 군수 열차 철도국 지도원으로 근무했었죠. 북한에서는 1호, 2호 전용열차가 있어요. 1호 열차 같은 경우 북한의 최고 통치자가 탑승하는 열차고 2호는 당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군수열차죠. 어느날 두만강에서 평양으로 가는 군수열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저는 재판정에 서게 됐어요.”
“죄목은 당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차가 뒤집혔다는 내용이었죠. 사실 그 열차는 노후된 열차였어요. 또 열차 사고라는 건 기술적인 문제로 발생하는 거죠. 지금 한국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을 못 할 일이지요. 제 동료로부터 사형선고 내용을 들은 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살을 할까 생각했어요. 북한에서의 자살행위 자체는 민족반역자 딱지가 붙으면서 3대가 멸족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김 회장이 떠난 곳은 양강도 혜산이었다. 그런데 막상 갔더니 저 멀리 중국이 보였다. 차라리 중국 땅에 가서 죽으면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7월 25일 밤 10시, 압록강을 헤엄쳐 넘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권총안전장치까지 풀었지만 막상 죽음의 문 앞에서는 살고 싶다는 소망이 문득 들었다.
“한 가게 앞에서 조선족 할아버지 한 분이 라디오를 듣고 있었는데 김만철 일가의 남한행 소식이 나왔어요. 처음엔 남한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한다고 생각했어요. 1986년도 김만철 일가가 달아났을 때 제가 근무했던 철도안전부에서 잡으려 했었고 동해함대 사령부에서 달아나는 걸 바다에 침몰시켰다고 보도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쭉 라디오를 듣다보니 북한에서 거짓말을 당했다는 걸 느꼈죠. 순간 나 같은 직위에 있는 사람도 거짓말에 속을 정도인데 인민들은 얼마나 사기와 기만에 빠져 여태껏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엔 방아쇠 안전장치를 다시 접었고 살아서 희망을 주는 쪽으로 걸어가야겠다고 결심했죠.”
죽음의 고비를 넘어 남한에 정착한 김 회장은 중국이나 제3국에서 떠도는 탈북민 구출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정착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도우며 희망과 용기를 심어준다. 김 회장은 인터뷰 도중 스스로 ‘인권 대통령’을 자처하던 현 정부에 대해 따가운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대한민국에 ‘동물보호법’은 있어도 정작 ‘탈북민보호법’은 없어요. 이러한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문재인 대통령은 스스로를 인권대통령이라 자처하는데 여기엔 모순점이 많아요. 그 중 대표적인 게 2019년 탈북민 한성옥 모자 아사(餓死) 비극이랑 지난해 동해 탈북어민 강제 북송 조치 등이죠. 이를 통해 남한에 가면 무조건 끌려온다는 걸 북한 주민들이 인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어요.”
특히 고(故) 한성옥 씨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올 때 자신이 도움을 준 탈북민이기에 더 마음이 아프다고 김 회장은 밝혔다. 한 씨는 아동수당 10만원과 양육수당 10만원을 국가로부터 보조받았는데 다른 수입이 없어 이 수당이 사실상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그해 3월, 아들이 6세가 되면서 아동수당이 끊겼고 한 씨는 아픈 아들을 돌보느라 일하러 나갈 수도 없었다. 이 사실을 알았던 김 회장은 구청과 통화를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며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탈북민들의 인권보호·안정적 사회정착 위해 적극 나설 것”
그도 같은 탈북민이었기 때문일까.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김 회장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으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토로하기도 했다. 기자도 듣는 동안 탈북민 인권 실태와 심각성에 대해 돌아볼 수 있었던 뜻 깊은 시간이었다.
북한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직접적인 동기는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 북한 주민들의 실상에 대해 김 회장에게 질문했다. 돌아온 대답은 선친인 김정일보다 인권 탄압이 심해졌다는 내용이었다.
“김정은 집권 이후 인권 탄압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어요. 어느 정도 식량 비축량이 있었지만 본인의 위상을 높이려고 핵무기를 마구잡이로 개발했죠. 무엇보다 남한 정권에서 지원물자를 북한에 보내면 군 당국, 보위부, 당, 경찰들이 가져가고 정작 주민들은 물자 부족으로 고통 받는 현실이에요. 이것만 봐도 심각한 인권 탄압이나 다름없죠. 또 김정은 정권에 중국이 힘을 실어주고 있으며 붕괴 수준까진 아니지만 북한 주민들이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상황이죠.”
“그동안 저희 단체는 북한 주민을 위해 쌀이나 이동식저장장치(USB) 등의 물품을 담은 페트병을 강화도 등 해안에 띄워 북한으로 보냈어요. 식량난 해소와 외부정보 유입으로 북한 주민들의 인식이 바뀌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죠. 사실 10개 중에 5개만 전달돼도 큰 성과거든요. 그러나 현 정부 출범 이후 경찰과 마을주민들을 이용해 봉쇄하면서 이러한 활동을 막았죠. 한마디로 북한주민을 사랑하면 안 되는 정권이 들어온 거예요. 그래놓고 통일을 거론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에 가깝죠.”
이밖에도 김 회장은 탈북민들이 처한 사회복지시스템의 민낯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표명했다.
“간암말기 환자였던 탈북민 남자분이 계셨어요. 어느날 누나에게 연락을 해서는 집도 없고 힘드니 조금 도와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누님이 주민센터에 문의를 했대요. 그랬더니 직접 나와야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대답이었다고 했어요. 사실 말기암 환자이고 나갈 수 없는 상태잖아요. 그래서 이 분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교회에 연결해줬어요.”
“결국 교회 쪽에서 직접 나가 환자분을 방문했죠. 갔더니 상태가 많이 안 좋고 어떻게 실질적으로 도와줄 수 있을까 방안을 찾아보시겠다고 했어요. 이렇게 해서 연결해드린 사례가 있었는데 아쉬운 점이 있어요. 왜 구청이나 주민센터 등에서는 적극적으로 위기에 처한 주민을 찾아가지 못하냐는 거예요. 분명 사회복지사가 1명 이상 있을 텐데 말이죠.”
끝으로 김 회장은 힘이 닿는 데까지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들의 인권보호와 안정적인 사회정착을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탈북민들은 항상 외롭고 따뜻한 손길이 그리운 사람들이라 많은 관심이 필요하죠. 결국 정부와 지자체가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한국정착 탈북민들을 위한 체계적인 시스템 구축을 마련해야 한다고 봐요.”
“마지막으로 저를 북한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10명의 소중한 생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사람을 살린다는 사명감은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찬 일이죠. 앞으로 걸어다닐 수 있고 제 힘이 닿는 데까지 적극 노력할 거예요.”
[이창현 기자 / 시각이 다른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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