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하나를 그리는 데 10개월이 걸릴 때도 있어요. 손에 1/3정도 밖에 감각이 없어서 붓을 쥐기가 힘들죠. 그림을 그리다가 힘이 풀려서 붓을 놓치는 바람에 그림을 망치기 부기지수에요. 하지만 그림은 저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 같은 역할을 해요. 장애인·비장애인을 떠나서 제가 힘들게 그린 작품을 보면서 누군가는 희망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죠.”
서울시 관악구에 위치한 미술 작업실에서 만난 동양화 채색화 화가 최지현(40·여) 씨는 지난 2004년 아파트 7층 높이에서 추락하는 불의의 사고로 장애인이 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여섯에 불과했다.
젊은 나이에 경추손상 사지마비, 이른바 ‘전신마비’ 판정을 받은 최 씨는 지금도 주위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이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 만큼은 여느 일반인 못지 않다. 그는 손에 붓을 고정시킨 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건물 7층서 추락 후 전신마비 판정, 재활 목적으로 시작한 미술로 제2인생
사고 전 ‘클럽DJ’로 일할 정도로 활발한 성격의 그였지만 사고는 그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줬다. 한 달이 넘는 시간동안 중환자실에서 보낸 후 가까스로 재활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평생 타인에게 의존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사고 후 재활치료를 시작하면서 병원에서 작업치료사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어요. 하지만 결혼 후에도 우울증은 심해지기만 했죠. 시간이 지날수록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이 커지더군요.”
“자살기도를 한 적도 있었어요. 그때 우연히 장애인들이 모여 그림을 그리면서 재활도 하고 마음도 치유하는 활동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재활 목적으로 취미 삼아 시작한 그림을 통해서 다시 살고 싶은 욕구를 되찾았어요.”
최 씨는 자신이 키우는 페르시안 고양이 ‘야동이’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주로 그린다. 그가 그린 고양이는 모두 파란색이라는 특징이 있다. 지난 2009년 개봉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아바타’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영화 속에서 장애를 가진 주인공은 아바타를 통해 자유를 얻게 된다. 최 화가 역시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와 그림을 통해 자유를 느끼려 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저는 휠체어에 갇힌 몸이잖아요. 남편이나 활동 보조인이 옆에서 돌봐주지 않으면 혼자 휠체어에 앉을 수도 없어요. 저는 문턱 하나 넘을 수가 없어 꼼짝없이 방 안에 갇혀 있을 때에도 야동이는 집안 곳곳을 누비고 다니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루 한 시간만이라도 야동이 몸에 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고양이를 그리게 됐죠. 처음에는 단순히 고양이의 모습을 그렸다면 이제는 고양이를 통해 저를 그리고 있어요. 마치 영화 ‘아바타’ 처럼요.”
최 씨는 먹과 한지를 이용한 동양화 채색화를 전문적으로 그리고 있다. 휠체어에 이젤(그림을 그릴 때 그림판을 놓는 틀)이 걸리기 때문에 그는 몸을 옆으로 튼 채 긴 막대기에 고정시킨 붓을 다시 손에 고정시켜 작업을 한다. 여러 번에 걸쳐 색을 쌓아 입히는 채색화 특성상 얇은 붓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근육통에 시달리기 일쑤다.
“손에 힘이 부족하고 감각이 없다보니 직선 하나를 긋기 위해서는 연필로 50번을 그렸다 지웠다 반복해야 해요. 정교한 작업을 하기가 힘든 거죠. 하지만 그림을 그리면서 꼭 직선만 답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살면서 누구나 힘들다는 생각은 하잖아요. 부족한 부분만 보지 말고 할 수 있는 작은 부분에서 꿈을 찾자고 생각했어요. 비록 미완성일지라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죠.”
“사회복지학 전공 살려 장애인 인식 개선에 일조할 것”
그의 작품에는 고양이 외에도 손과 발, 핑크색 리본 등이 자주 등장한다. 손과 발은 자유롭지 못한 최 화가 본인을 나타낸다. 핑크색 리본은 지난해 8월 유방암 수술 이후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핑크색 리본은 유방암을 상징한다. 1991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방암 생존 환자들의 달리기 대회에서 핑크색 리본을 나눠주면서 유래됐다.
“유방암 수술 받기까지의 시간은 사고 이후 겪었던 가장 힘겨웠던 일 중 하나였어요. 몸도 마음도 지쳤고 미술로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했던 꿈도 포기하고 싶었죠. 하지만 제가 그린 그림이 누군가에게 공감을 얻고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됐어요.”
“작품을 통해 저처럼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빨리 희망에 닿을 수 있는 지름길을 알려주고 싶어요. 비장애인들도 마찬가지예요. 힘들게 얻은 결과물들을 보면서 눈앞에 놓인 답답한 현실을 잘 극복해 나갔으면 좋겠어요”
최지현 씨는 오는 3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교 동양화 석사과정 진학에 앞서 서울디지털대학교 회화과 졸업전시를 앞두고 있다. 이 밖에 지역아동센터에서 미술 강사로 나서는 한편, 장애인식 개선과 장애예방 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그는 미술과 함께 배운 사회복지학 전공을 살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인식 차이를 좁혀나가고 싶다고 포부를 드러냈다.
“장애인들이 설 곳이 많이 없잖아요.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하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도 생기고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우러져서 지낼 수 있는 사회분위기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사고 전에 제가 생각했던 별 것 아닌 일들이 장애인이 되고 보니까 무척 크게 와 닿더라고요. 앞으로 꾸준히 이러한 메시지를 작품에 녹이고 봉사활동을 통해서 장애인 인식 개선에 힘쓰고 싶어요.”
[배수람 기자 / 행동이 빠른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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