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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운은 거절하는 법을 배운 적 없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부도로 가여워진 동우와 끝없이 체인지 파트너를 하며 춤을 추느라 가정에서 존재감 없던 아버지의 빈자리, 그리고 완성할 수 없었던 첫사랑에 대한 상처가 자신을 일방적으로 바라는 동우에게 연민을 갖도록 했다. 동지애 같은 것이었지만 진짜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싸구려 여관의 침대 위에 동우가 허겁지겁 그녀를 쓰러뜨릴 때, 동우가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 때, 하운은 저항하지 않았다. 동우가 스커트를 들어 올릴 때,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날 동우와 하운은 처음으로 남자와 여자가 되었다.
“현성이만 바라보는 널 기다리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는 모를 거야.”
그래도 만약 동우가 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하운은 동우를 온전히 끌어안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연민이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까. 애초에 그릇된 선택이었다고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입대한 동우는 빈번하게 편지를 보내왔다. 하운은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동우를 기다릴 의도는 아니었다. 졸업하고 출판사에 취직했고 일에만 빠져 살았다. 남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흥미도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이 아닌 저곳, 여기가 아닌 어디로든 달아나고 싶었다.
부재하는 아버지에게서, 불행의 모든 원인을 남편에게 돌리고 아들 바라기만 하는 어머니에게서, 함께 있으나 버려진 것 같은 그 집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합법적으로 집을 나와 ‘나만의 집, 나만의 인생’을 갖고 싶었다. 지금이 아닌 미래, 현재가 아닌 다른 모습이 되고 싶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변화하고 싶었다. 순진하게도 혹은 미련하게도, 결혼이 인생을 통째로 바꿔 놓길 바랐다.
동우는 그녀를 정말 사랑하는 것 같았다. 식물처럼 사랑도 잘 키우면 되는 건 줄 알았다. 동우가 제대하고 졸업한 뒤 하운은 결혼했다. 현성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가야겠어요.”
오래전 이야기를 마치고 하운이 성급하게 돌아섰다. 내가 하운의 팔을 붙잡았다.
“유리, 같이 보기로 했잖아요.”
하운이 어깨에 멘 가방을 내려 손에 꼭 쥐었다.
“또, 나를 속일 뻔했어요.”
나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운은 돌아서서 몇 걸음 걷다가 멈췄다. 로비에 장식되어 있던 화병에서 흰 수선화 한 송이를 뽑아 와서는 내 코트 깃에 꽂아 주었다.
“동우와 저질렀던 실수.”
“무슨 말이에요?”
“나를 포기하는 사랑. 나를 버리고 대신 상대를 끌어안는 사랑. 나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사랑.”
하운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알겠어요. 날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누굴 사랑하고 있었는지.”
하운이 돌아섰다. 내가 얼이 빠져 있는 동안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 안에서 하운이 나를 타인처럼 쳐다보았다. 문이 닫혔다. 뜯지 말아야 할 봉인을 뜯은 결과였다. 내 심장이 단두대에 잘린 머리처럼 퉁, 발등을 찧으며 굴러떨어지는 것 같았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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