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의 도시는 이미 깊은 어둠에 잠겼지만 빅테크 대기업 홍보실 회의실의 공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는 차갑게 식은 배달 음식 용기와 붉은 펜으로 고쳐 쓴 기획안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수석님, 제발요. ‘NPU 40테라플롭스(TFLOPS)’라는 표현을 그대로 내보내면 소비자는 읽다가 바로 화면을 넘깁니다.”
홍보실 책임자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 며칠째 이어진 회의와 수정 작업의 흔적이었다. 그러나 연구소 수석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연구원 300명이 2년을 매달린 기술입니다. ‘사진이 잘 찍힌다’는 말로 끝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이번 자료에는 반드시 이 성능 수치가 들어가야 합니다.”
연구소 입장에서 그 숫자는 단순한 스펙이 아니었다. 수백 명의 연구원이 쌓아 올린 시간과 시행착오, 실패와 돌파의 결과물이었다. 숫자를 빼자는 말은 곧 기술의 본질을 덜어내자는 요구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다.
홍보실의 고민은 달랐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면 시장에 닿지 않는다. 기술의 우수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언어로 바꾸는 것, 그것이 홍보의 역할이었다.
홍보실 책임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선물도 열어보고 싶게 만들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제 일은 수석님의 기술을 가볍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 기술이 왜 필요한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세상에 이해시키는 일입니다.”
회의실 안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기술을 지키려는 연구소와 기술을 전달하려는 홍보실의 충돌은 어느 기업에서나 반복되는 장면이다. 연구자는 정확한 수치를 원하고, 홍보 담당자는 그 수치가 소비자에게 어떤 효용으로 전달되는지를 고민한다. 양쪽 모두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기술의 언어와 시장의 언어가 다르다는 점이다.
답답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순간, 홍보실 책임자는 생성형 AI 기술을 활용해 새롭게 구성한 시안을 연구소 수석에게 내밀었다. 화면 속에서는 딱딱한 반도체 칩셋 이미지가 거대한 서버실을 거쳐 미래형 스마트시티의 장면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문구도 달라졌다.
‘한국의 빅테크 기업이 해냈습니다. 이 작은 칩 하나로 초거대 AI의 꿈이 현실이 됩니다.’
숫자에 갇혀 있던 기술은 이제 소비자가 상상할 수 있는 변화로 옮겨졌다. 수석의 굳은 표정에도 미세한 변화가 일었다. 성능 수치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숫자가 제품의 출발점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는 근거로 재배치된 것이다.
기술 홍보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대중은 ‘얼마나 빠른가’보다 ‘그래서 내게 무엇이 달라지는가’를 먼저 묻는다. 기업은 기술을 만들지만 시장은 그 기술이 가져올 변화를 산다. 혁신이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순간은 실험실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혁신을 이해 가능한 언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완성된다.
갈등의 파도가 지나간 뒤 홍보실의 업무는 오히려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새벽이 깊어질수록 회의실 모니터의 불빛은 더 선명해졌다. 누군가는 발표 자료의 흐름을 다시 잡았고, 누군가는 보도자료의 문장 하나를 두고 여러 차례 수정을 거듭했다. 기술 설명 자료와 소비자용 메시지, 임원 발언문과 질의응답 문서가 동시에 다듬어졌다.
책상 위에는 빈 커피잔과 구겨진 출력물이 쌓여갔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은 단순한 문장 수정이 아니었다. 실험실의 언어를 시장의 언어로, 수치의 언어를 생활의 언어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무대 위에서 빛나는 신제품 뒤에는 이런 보이지 않는 번역의 시간이 놓여 있다.
이 같은 장면은 특정 기업의 예외적인 풍경이 아니다. 테크 업계의 역사에서 위대한 혁신이 대중의 사랑을 받기까지는 늘 기술을 사람의 언어로 바꾼 커뮤니케이션의 순간이 존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애플의 아이팟이다. 2001년 애플이 아이팟을 선보일 당시 엔지니어의 언어로 표현하면 제품의 핵심은 1.8인치 하드디스크, 5기가바이트 저장공간, 파이어와이어 전송 기능을 갖춘 휴대용 음악 재생기였다. 기술적으로는 분명 의미 있는 진전이었지만 대중에게는 복잡한 사양의 나열에 가까웠다.
스티브 잡스는 이를 단 한 문장으로 바꿨다.
“내 주머니 속의 노래 1,000곡.”
소비자는 하드디스크의 크기나 저장용량의 단위에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바지 주머니 안에 음악 1,000곡을 넣고 다닐 수 있다는 변화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기술적 성취가 소비자의 일상적 욕망으로 번역된 순간이었다. 이 문장은 이후 기술 홍보의 고전적 사례로 남았다.
맥북 에어의 등장은 또 다른 장면을 만들었다. 노트북 제조사들이 두께 몇 밀리미터, 무게 몇 킬로그램을 놓고 경쟁하던 시기 애플은 숫자의 싸움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서류봉투 하나가 등장했고, 그 안에서 노트북이 꺼내졌다. 얇다는 설명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소비자는 수치를 계산하지 않아도 제품의 정체성을 직관적으로 이해했다.
기술의 언어가 이미지로 번역된 것이다. 얇고 가벼운 노트북이라는 메시지는 복잡한 스펙표가 아니라 한 장면으로 각인됐다. 커뮤니케이션은 때로 설명보다 강하다. 좋은 홍보는 기술을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의미를 가장 짧고 정확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가전 시장에서도 비슷한 고민은 반복돼 왔다. 청소기 성능을 설명할 때 기술진은 모터의 분당 회전수인 RPM이나 흡입력을 나타내는 에어와트(AW)를 앞세우고 싶어 한다. 수치가 높다는 것은 분명 기술적 경쟁력이다. 그러나 소비자가 제품을 선택하는 순간 떠올리는 것은 모터 내부의 회전 속도가 아니다. 아이가 기어 다니는 거실 바닥,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 반려동물의 털, 알레르기 걱정 같은 생활의 장면이다.
그래서 좋은 메시지는 “강력한 흡입력”에서 멈추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초미세먼지까지 잡아내 가족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바닥을 만든다”는 식으로 기술의 결과를 보여준다. 소비자가 반응하는 지점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이 제공하는 안심과 편의다.
스마트폰 카메라도 마찬가지다. 이미지센서 크기, 조리개 값, 연산 처리 속도, AI 보정 알고리즘은 제조사 입장에서 중요한 기술적 자산이다. 그러나 소비자는 “어두운 식당에서도 아이의 표정이 또렷하게 남는다”, “움직이는 반려견의 순간을 흔들림 없이 담는다”는 말에 더 쉽게 반응한다. 기술은 정확해야 하지만 메시지는 삶에 가까워야 한다.
다시 빅테크 기업 홍보실의 새벽. 최종 기획안에는 ‘NPU 40테라플롭스’라는 숫자가 전면 문구에서 빠졌다. 대신 그 자리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들어갔다.
“인터넷이 끊긴 비행기 안에서도 나만을 위해 1초 만에 문장을 요약하고 이미지를 그려내는 손안의 인공지능 비서.”
숫자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뒤로 물러났다. 상세 설명과 기술 자료에는 성능 수치가 남았다. 그러나 소비자와 처음 만나는 문장은 달라졌다. 기술을 모르는 사람도 이 제품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연구소 수석은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 정도라면 우리 기술이 왜 필요한지 설명이 되겠군요.”
홍보실 책임자는 그제야 짧게 숨을 내쉬었다. 타협이 아니라 연결이었다. 연구소가 쌓아 올린 기술의 탑에 대중이 걸어 들어올 수 있는 문이 열린 순간이었다.
오늘날 기업의 혁신 경쟁은 기술 개발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반도체, 인공지능, 배터리, 로봇,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일수록 기술의 난도는 높아지고 소비자와의 언어적 거리는 멀어진다. 이 간극을 메우지 못하면 혁신은 실험실의 성과에 머문다. 반대로 기술의 의미를 정확하게 번역해 낼 때 혁신은 시장의 상식이 된다.
홍보는 기술을 포장하는 일이 아니다. 기술이 세상과 만나는 방식을 설계하는 일이다. 연구자가 만든 성능의 숫자를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가치로 바꾸고, 기업의 성취를 사회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연결하는 작업이다.
세상은 무대 위의 신제품과 화려한 발표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그 박수가 만들어지기 전, 무대 뒤편에는 수치와 용어 사이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외계어처럼 들리는 기술의 언어를 사람의 언어로 바꾼다. 그래서 혁신은 비로소 소비자의 손에 닿고, 기업의 기술은 세상의 변화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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