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알아서 대환대출까지 해주는 세상이다. 작년 말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된 AI 에이전트를 활용한 ‘금리인하 요구권 대리실행’ 행사로 약 16만 명이 1000억 원가량의 이자를 절감했다니 기술과 금융의 화려한 로맨스다.
프레임 밖 현실은 여전히 잔혹하다. AI 사고의 책임 소재조차 확립하지 못하고선 SNS 금융 정보 유통에만 가위질을 해대고 있다. 화려한 정책이 폭죽을 쏴올리는 동안 소비자는 법적 위험과 정보 가뭄이라는 이중고에 덩그러니 방치됐다.
금융당국 행보로 보자면 단연 속도전이다. 사전예방적 감독 성과 보고회부터 마이데이터 확대, 주민등록번호 변경 일괄 연계 시스템까지 매머드급 정책이 연일 쏟아진다. 사후 징계와 공급자 중심 관행적 행태를 깨고 ‘소비자 체감’으로 패러다임을 뜯어고치겠다는 의지다.
그런데 현장 시선은 어째 서늘하다. 소비자 보호라는 명분 아래 추진되는 정책들이 정작 금융 문턱을 높여 접근성을 가로막는 ‘보호의 역설’을 낳는 탓이다.
단적인 자화상이 투자성 상품의 가입 절차다. 금융 당국은 최근 펀드와 신탁 가입 시간을 최대 50% 단축하고, 301자에 달하던 자수 문구를 51자 수준으로 줄이겠다는 개선안을 발표했다.
창구의 한숨을 줄여줄 단비 같지만, 뒤집어보면 그동안 당국의 획일적인 판매 규제가 금융사의 책임 회피성 설명과 무의미한 서류 폭탄을 양산해 왔음을 자백한 꼴이다. 소비자를 보호하겠다며 만들어놓은 장치가 정작 편의를 저해하는 절차적 폭력이었던 거다.
더 큰 문제는 기술 혁신의 화려함 뒤에 방치된 책임의 공백이다. ‘My AI 에이전트’를 통한 비대면·대리 금융 계약이라는 자율주행 도로를 깔아주며 혁신을 독려하고 있지만 AI 에이전트의 오작동이나 프라이버시 침해, 시스템 오류와 같은 사고가 터졌을 때의 책임은 누구에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법적 가이드라인조차 안갯 속이다. 속도전에 치여 핵심 사안인 보안 거버넌스가 뒷전으로 밀려난 셈이다.
알고리즘 뒤에 숨은 금융사와 당국 간 분쟁 소지는 커지는데 정교한 안전벨트도 없이 속도만 높인 격이라 사고 위험은 소비자가 짊어질 몫으로 남겨졌다.
SNS 금융광고 규제 강화와 자율규제 확대 역시 세심한 칼날이 아쉽다. 자극적인 뒷광고나 허위·과장 정보를 엄단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지만, 당국의 엄격한 잣대가 합리적인 시황 분석과 양질의 정보 유통마저 위축시킨다면 피해는 정보에 목마른 소비자에게 돌아간다. 불법 정보 척결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시장의 자율 정화 기능을 가두는 일방통행식 규제가 해법일 리 없다.
화려한 수치나 정책 로드맵을 제시하기 전에 소비자 보호라는 명목으로 둘러친 규제 빗장이 역설적으로 금융의 문턱을 가로막고, 시장 혁신의 발목을 행정 틀 안에 묶어두고 있지는 않은지 짚어볼 일이다.
규제 밧줄로 시장을 옭아매는 건 소비자 보호를 빙자한 행정 편의라고 본다. 불필요한 장벽을 철거하고 위험 없이 누릴 수 있는 금융 활주로를 터주는 게 진짜 소비자 권익 증진이다.
시장이 갈구하는 건 관료적 통제가 아니라 자율의 활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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