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이란 이름의 문재인 정부 과속열차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끝내 건너고 있다. 그 끝은 현란한 정의로 포장된 시한폭탄이 삼지사방에서 재깍거리고 있는 곳이다. 아름다운 포장 속에는 파멸의 폭주 시간표를 수놓은 자폭장치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후퇴를 모르는 역천(逆天)의 길이라는 것을 모르는 공포가 엄습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아직도 그 길이 옳다는 환상에 빠져 있다면 더불어민주당 일당주의 국회 방망이가 장악하고 있는 무너진 협치를 보면 안다. 수백여개에 달하는 반기업법, 증세법, 임대차법, 젠더법, 사회관계법, 과거사법, 공수처법 등에 일체의 반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국가를 표방한 의회의 일방주의가 연일 불방망이처럼 내려치고 있다.
인권·약자·평등이 펄럭이는 이른바 트로이카 도덕률이 실현돼야 할 공동선의 절대선 빗장은 결코 열리지 않을 에덴의 대문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그 기세가 당연히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최소 20년, 많게는 100년은 집권해야 할 당위성이 집권 설계도에 들어 있다고 당당히 말하기까지 한다. 일당 독주로 당을 끌어 왔던 이해찬 전 대표의 입은 20~100년 지배를 당연시 했다.
마치 정의의 트리니티가 된 땅의 계율이 하늘의 삼위일체 계율보다 높아 보인다. 입법·사법·행정의 헌법가치 자유민주주의 삼발이를 인권·약자·평등에 반하는 악이라고 설정한 듯 행동한다. 그리고 그 절대선으로 모든 것을 대체가능하다고 믿는 신념이 인권·약자·평등을 오히려 끝없는 사선으로 내몰아 두렵다. 결국 전무후무한 기적의 경제번영과 민주주의라는 대한민국 트레이드마크가 동시에 뿌리째 뽑히려 하고 있다.
거여의 기세가 상임위 싹쓸이라는 헌정 사상 초유의 결과를 촉발, 국회는 코로나 국면 속에서도 통과의례의 문으로 전락하는 상황이 왔다. 가히 입법 세몰이의 화룡점정은 부동산이 찍었다. 그 문의 수문장격인 윤호중 법사위원장은 부동산 관련 11개 법안을 단독으로 처리한 날 ‘국민이 집의 노예에서 벗어난 역사적인 날’이라고 했다. 집을 살 때나 보유할 때 그리고 팔 때 모두 증세폭탄 3법을 떨어뜨려 ‘집 소유욕’을 갖는 것이 공포이게 만든 참담한 입법 자긍심이다.
종부세법·소득세법·지방세법은 전 국민의 재산목록 1호를 향해 난사한 사건이다. 무주택자들에게는 한푼 두푼 치열하게 모은 돈으로 집 사기를 무섭게 하는데서 나아가 포기하게 만들었다. 1주택자들에게는 집을 갖고 있으면 버틸 재간이 없을 상황을 기막히게 선물했다. 갭투자 등으로 재산을 증식해 온 다수의 서민들인 2주택자들은 아예 죄인 취급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자들은 증세폭탄에 오히려 이판사판 끝까지 해보자는 전투대형으로 전열을 다듬었다.
끝내 증세3법과 임대차3법에 일반 국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격한 울분을 연일 토해냈다. 국민간 불신까지 극에 달했다. 지난 한 달만 해도 국민들 간에 분쟁이 폭증했다. 서울시의 경우 주택임대차분쟁위원회를 찾는 시민들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3배나 늘었다. 나아가 전세값과 집값은 폭등하고 전세매물마져 사라지면서 법사위원장이 말한 집의 노예를 벗어나는 월세시대가 비극적으로 열렸다.
정부는 최근 서민들의 울분을 무시하듯 부동산거래분석원 설치까지 공언하고 나섰다. 집을 사거나 팔 때 낱낱이 돈 거래를 뒤져 보겠다는 심산이다. 한국인 특유의 ‘내 집 마련 DNA’ 속에는 투자와 투기를 정말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다반사다. 이를 선악으로 가르려면 전 국민과 싸워야 하는 사태를 맞는다. 백번 양보해 국민 모두를 악 내지 잠재적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맞는다고 한다면 정권은 정말 털끝 한 자라락도 부조리가 없는 모습을 굳건히 지켜가야 한다.
지금까지 코로나 사태로 일시 가려진 숱한 권력형 부조리를 보면 참담하다는 것이다. 국민은 현 정권의 도덕성을 반드시 지켜보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선악을 가르기 힘든 현안에 그 칼을 들이댈 때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의심을 당연히 받는다는 점이다. 이처럼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고 있는 위험한 폭주는 부동산 이외의 정책에서도 무차별 벌어지고 있다.
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 등 공경경제 3법은 모든 기업을 국민처럼 공개적인 악이자 잠재적 악의 축으로 선언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근로인권이 절대선이고 경영은 그 깃발의 부속물로 전락했다. 노동조합법은 기업인들에게 비수를 품은 턱밑 적까지 품으면서 무능력을 무한정 포용해야 할 상황을 선사했다. 이 같은 수많은 반기업법의 창으로 권력은 어떤 기업이든 언제든 목줄을 죌 수도 있게 됐다.
반면 기업은 피같은 자금을 투자만 하고 팔·다리를 묶인 채 경영해야 한다. 하물며 치열한 경쟁이 상시 일어나는 시장에서 상대가 알아서는 안 될 기밀까지 무방비 노출시켜야 한다. 자유시장의 운전대인 경영이 사실상 감옥에 갇혔다. 적자가 나고 망해도 한 마디 말을 못한 채 눈 가린 운전을 멈추지 말아야 할 족쇄가 채워졌다. 이들이 세계시장을 누비며 경쟁할 수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기업인은 적자가 나면 중죄인이 된다는 엄혹한 현실에 늘 미결수(죄인)의 스트레스를 갖고 산다. 따라서 기업은 미지의 위기가 수시로 닥치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늘 사내유보금을 쌓아 놓는다. 최근 정부는 사내유보금까지 과세폭탄을 날리겠다고 칼을 들었다. 정상적인 유보소득과 탈세목적 유보소득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정상적인 사내유보금까지 들여다보면 경영자들은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다.
범여권에서 추진하는 젠더법이나 최근 대법원의 전교조 관련 판결도 위험하다. 포괄적 차별금지라는 현란한 간판을 단 젠더법은 진짜 성소수자를 오히려 두 번 죽일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가정의 파괴를 촉발하고 나아가 극도의 사회불안을 야기할 것이 뻔하다. 다른 나라를 쫓는 명분은 우리에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서 사의 찬미를 부르는 식이다.
법외노조로 있던 전교조 또한 이미 학교에서 권력화를 넘어 그들만의 성역화 담장을 높이 쌓은 지 오래됐다. 전교조 내에서 조차 양심 있는 교사들이 이젠 양심의 소리를 내고 있을 정도다. 참교육·산교육이라는 깃발 아래 비리와 특권의 얼룩이 도를 넘었다. 학교 행정직원들은 그들의 세계가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노조의 지위를 다시 확보하게 된 그들에게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맡기는 것 자체가 공포로 변했다.
제21대 국회의 규제관련 법안이 이달 초 기준 벌써 400여건에 달하고 이중 200여건은 반기업·친노동 관련법이다. 엄중한 코로노 폭풍 속에 들이닥친 족쇄법이 인권·약자·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삼지사방에서 펄럭인다. 인공적인 권력의 선이 절대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수없는 역사가 증거해 왔음에도 문재인 정부는 억척스럽게 끌고 간다. 그것이 악으로 돌변해 자신들 뿐만 아니라 모두를 파멸시킬 징조가 보이고 있음에도 질주한다. 잘못된 선의 철학과 이념에 브레이크가 사라졌다.
동서양 철학과 종교의 공통점은 본질과 형상, 무위와 유위, 이(理)와 기(氣), 성(性)과 정(情), 공(空)과 색(色), 이(理)와 사(事) 등의 공존이었다. 선과 악 역시 섞일 수도 없고 분리할 수도 없는 사상이 공유돼 왔다. 자연과 생명의 근원인 빛의 원리조차 섞일 수 없는 음양의 전기(電荷)와 분리할 수 없는 양극의 자석(磁荷) 간 치열한 공존이다. 영원히 만날 수 없지만 절대 없으면 안 되는 평행한 기찻길의 원리가 바로 공존의 협치다.
문재인 정부의 독트린은 협치를 무시한 대가로 인권·약자·평등이 더 망가지고 있다. 국가는 더 큰 위험 속으로, 국민은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 조차 모르거나 간과하고 있다면 순천(順天)의 질서를 역주행 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작금의 일방주의는 인공적인 자신들의 도그마로 추락했다. 선이 모든 것을 집어 삼키며 선악의 이분법을 가장 명료하게 만들었지만 그만큼 더 큰 악을 불러들여 화근을 키웠다. 이젠 국운의 회복을 위해 협치를 통한 공존의 질서로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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