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2001년 54세 타계
전통 위에 현대성 접목한 ‘숨은 그림 찾기’ 연작
90년대 태풍의 눈… 우리다운 정서와 미학 구축
올해 타계 20주기, 그의 빈자리 여전히 커 보여
한국화가 황창배가 타계하기 1년 전, 그러니까 2000년 췌장암 투병 중이던 그로부터 인사동(서울 종로구) 어느 카페에서 잠시 보자는 전갈이 왔다. 충남 논산에서 작업 중인 무명의 젊은 작가를 위해 개인전을 주선, 후원하고 있어 필자에게 서문을 청탁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유망 기대주에게 멘토링을 베풀고 있었던 것 같았다. 본인의 건강이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처지에서도, 젊고 유망한 무명작가를 물질적, 정신적으로 후원한다는 일이 뭉클하면서도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전시는 그가 원하는 대로 잘 끝났고, 얼마 후 예감은 빗나가지 않아 타계의 부음을 들어야 했다. 화가에게 50대 중반이란 정말이지 자기 세계를 막 꽃 피울 시기인데, 안타깝게도 요절을 했고, 그의 타계는 우리 미술계에도 적지 않은 손실이었다. 대중적 인지도에서나 예술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한국화 화단의 빛나는 별이 질 때의 모습은 의연하고 인간애 넘치는 모습이었다.
지난 1990년대 그는 TV광고 모델로도 나올 정도로 미술계에서 스타였다. 현대한국화에서도 그는 현대화 기수의 역할을 맡고 있어 그의 작업은 화단이나 시장에서 주목의 대상이었다. 세계화의 격랑 속에서 좌표를 상실하고 있던 한국화 화단이 보편적 시대정신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있어서 가능했다. 그러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어 부담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학이라는 일종의 보호장치를 풀고 치열하게 작업해야 하는 전업작가의 길을 가겠다는 결심으로 명문대 교수직도 벗어 던졌다. 그의 이러한 모험적 결단은 당시 화단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80년대 혜성처럼 나타난 그의 등장은 표류중인 한국화 화단이 선장을 맞이한 것처럼 화색이 돌았다. 지난 16일(화요일) 서울 연희동의 ‘황창배기념관’에서 열린 20주기 회고전에서 보듯, 당시 그가 선보인 양식은 표현주의적인 활달하고도 은유성 짙은 전통적 수묵을 기반으로, 우리 공동체의 신화적 원형을 구현해내는 화면이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참신하고 품격이 넘치는 세계이다. 의도와 우연적 효과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당시의 ‘숨은그림 찾기’ 연작은 현대한국화의 교과서와 같은 위상을 지닌다. 수묵이 번져 나가는 자연적 물성은 우연적 효과로 화면의 격조와 은유성을 고조시키면서, 거기에 강렬한 채색의 이미지가 절묘하게 조율되고 은폐되어 작품의 독해 자체가 심미적 경험이 되게 하는 묘미를 전하고 있다. 작가의 작업은 몇 가지 이질적인 요소들이 조합을 이루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수묵과 채색, 추상과 형상, 문인화와 민화, 그림과 문자 등의 조합 말이다.
특히 작가는 아카데믹한 한국화에서 거리를 두고 있었던 민화적 모티브를 도입한 데서도 높이 평가받는다. 문인화의 지식 계층의 취향과, 민화의 서민적 취미를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작가만의 독점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가 지나치게 도식적이거나 설명적이어서 밀도와 완성도 면에서 갈증을 느끼는 애호층에 어필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는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의 첨예한 대립으로 얼룩지고 있을 때였다. 작가는 모더니즘의 현대성과 민중미술이 중시한 민족적 정체성 양자를 자신의 화면에서 조합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출함으로써, 화두가 되었던 탈모던의 방법적 솔루션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황창배의 독자적인 방법론은 화단에서만이 아니라 미술시장에서도 폭발적 반응을 보였다. 시쳇말로 없어서 못 파는 블루칩 작가였다. 그랬던 그가 90년대 접어들면서 교수직을 떠나 더 자유로운 작업을 위해 홀로서기를 감행하였다. 부단히 자기 갱신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것이 무슨 한국화냐’는 힐난도 없지 않았다. 장르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로운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화과 교수’라는 직함도 부담이 됐을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자신감도 있었겠지만 그런 부담도 결단의 한 원인인 것은 분명하다. 아무튼 90년대 초 교직을 떠난 작가의 작업은 거침없이 다양한 실험을 이어간다. 그런데 그의 실험과 새로운 시도가 항상 호응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대중은 어딘지 모르게 낯선 그림을 생소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1997년 4월 필자가 작가와 도쿄 아트페어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주석에서 주흥이 돋을 무렵, 취기를 빌려 필자가 오랫동안 조심스러워했던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선생님, 80년대의 ‘숨은 그림 찾기’ 시리즈 작품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데, 왜 더 그리지 않으십니까?” 그 질문에 작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어느 순간 많은 후학들이 나의 작업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 그림 파는 것은 언제고 가능하니 에너지가 따라줄 때 실험치를 최대로 끌어올리자는 결심을 했지.”…“호랑이 등에 올라탔으니 계속 나가는 거지.”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한국화의 질적 도약을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인데, 그게 숙명적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과제로 인식했던 것 같다.
2000년대 들어 모든 사회가 그러하지만, 미술환경도 많이 변했다. 뉴미디어나 설치미술의 자극적인 컨텐츠는 그야말로 블랙홀이 되었다. 그 와중에 많은 것들이 잊혀지고 있었다. 고독한 개척자 ‘황창배’라는 이름도 대중들의 기억 속에 희미해져 있다. 한,중,일 삼국이 공유하고 있는 동양화라는 카테고리를 다시금 한국화, 중국화, 일본화로 분화시키고 있는 시점에서 황창배의 존재가 얼마나 듬직했었던가. 우리다운 정서와 미학을 견고하게 구축한 상태에서 미래지향적인 한국화의 방향성을 당당하게 제시했던 황창배, 그의 빈자리는 여전히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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