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정부가 24조 원 규모의 23개 국책사업의 예비타당성 조사를 대거 면제한 데 이어 이달 초 예타 개편안까지 내놓으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예타 개편안 핵심은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예타 평가 기준을 달리 적용하는 데 있다. 비수도권 예타 평가 때 번번히 통과의 걸림돌로 작용했던 경제성 비중은 낮추고 지역균형 비중을 높이는 게 골자다. 기존에 경제성이 없어 탈락된 대규모 SOC사업들이 개편안이 적용되면 무더기 통과될 수 있는 셈이다. 상황이 이런 만큼 정치권 및 시민단체들은 무분별한 예산 낭비를 막자는 예타 제도 취지를 정부가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과거 문재인 정부의 경우 이전 정부가 추진했던 대규모 SOC사업을 토건중심 사고라고 강하게 비판해왔다는 점에서 내로남불 행정이라는 비판마저 나온다. 스카이데일리가 ‘예비타당성 개편안 허와 실’을 금주 이슈포커스 주제로 선정하고 관련 내용을 세 편에 걸쳐 보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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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임현범 팀장|이승구·문용균·나광국 기자]문재인정부가 이달 초 사회간접자본(SOC)사업 활성화를 명분으로 예비타당성조사(이하·예타) 문턱을 낮추는 내용의 개편안을 내놓은데 대해 날 선 비판의 목소리가 일고 있다. 국민 혈세가 선심성 사업 추진에 이용될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전국을 토건판으로 만들기 위한 무력화 방안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이러한 지적은 정부가 지난 1월 24조에 달하는 예타 면제 사업 발표 당시에도 한 차례 불거져 나온 바 있다. 정부가 마구잡이식 토목사업을 장려해 지역의 균형발전보다는 예산낭비 사업들의 무분별한 추진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내년 총선을 위한 선심성 정책 추진에 골몰하고 있다는 비판이 높게 일었었다.
무엇보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이번 예타 개편안을 계기로 그동안 지역균형발전 배점 중 경제성 때문에 예타를 통과하지 못한 SOC 사업을 재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지자체가 정부의 예타 개편안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곳곳에서 새어나오고 있다.
현행 제도의 부실화·무력화 불러오는 文정부 예타 개편안
문재인정부는 지난 3일 예타 제도 개편안을 발표했다. 지난 1999년 김대중 정부 시절 도입된 지 20년만의 개편이다. 예타 제도는 예산낭비 국책사업이 무분별하게 진행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도입됐다. 총사업비 500억원 이상이고 정부의 재정지원 규모가 300억원 이상인 사업이 대상이다.
문재인정부가 내놓은 개편안은 비수도권 사업의 경우 경제성 비중을 30∼45%로 5%p 내리고 지역균형발전 비중은 30∼40%로 5%p 올리는 내용이 골자다. 경제성보다는 지역균형 평가에 무게를 둬 지방에서 수요가 적은 사업의 통과 문턱을 낮춘 것이다.
정책평가의 비중은 기존의 25∼40%를 유지하되 일자리, 환경, 생활여건 개선 등 사회적 가치의 항목을 신설했다. 이 역시 경제성과는 거리가 먼 항목들이다. 항목이 많아진만큼 비수도권 국책사업의 예타 통과 가능성이 이전보다 커질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정부는 예비타당성 조사기간을 평균 1년7개월에서 1년 내로 단축시키는 내용도 개편안에 포함시켰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예타 개편안이 지역의 균형발전보다 선심성 예산낭비 사업들이 무분별하게 추진되도록 부추기는 등 예타 제도를 무력화하고 있다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최진수 경제정의실천연합 부동산건설개혁본부 차장은 “그동안 예타를 통과했음에도 막대한 적자를 내고 있는 사업들을 분석해 예타를 내실 있게 개선해야 하지만 정부는 오히려 예타를 무력화하려 하고 있다”며 “지역 특성별 맞춤평가로 지역간 형평성 제고를 내세우지만 실상은 정권의 입맛에 따라 수도권・비수도권 모두 사업진행을 하겠다는 것이다”고 비판했다.
앞으로는 경제성 분석 기관과 종합평가(AHP) 기관을 분리해 예타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내용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현재 한국개발연구원(KDI)가 경제성 분석뿐 아니라 정책성, 균형 발전을 포함한 AHP까지 담당했던 것에서 앞으로는 기획재정부 내 재정사업평가위원회에서 AHP를 담당하도록 하겠다는 게 정부의 복안이다. 이를 두고 결국 정부가 정치적으로 사업추진을 좌지우지하겠다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상봉 한성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KDI에서 예타를 담당하던 사람들이 사업에 필요한 기술과 비용에 대해선 가장 잘 아는데 위원회를 따로 둔다는 건 비효율적이다”며 “이미 23개 사업이 면제된 상황인데 정권이 바뀌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역 민심을 노린 ‘선심성 퍼주기’ 일환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고용참사와 경기침체 코너에 몰린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예타 면제를 우회삼아 타당성은 낮지만 즉각 삽을 뜰 수 있는 대형 SOC사업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건설부문 취업유발계수는 10억원당 13.9명으로 제조업(8.6명)의 1.6배에 달할 정도로 경기부양의 ‘즉효약’이다.
최승섭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부동산건설개혁본부 팀장은 “기존 예타사업에서도 부실한 사업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규모를 축소한다는 것은 그만큼 부실사업이 많아질 수 있는 의미다”며 “무분별한 토건사업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대다수 수혜는 재벌 건설사들과 다단계 건설업자들이 누릴 뿐이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예타 제도를 대폭 손질했지만 개편된 제도가 지역 숙원사업 추진 민원 창구로 악용될 소지가 커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무엇보다 KDI와 조세재정연구원의 경제성 분석을 바탕으로 종합평가를 하게 될 분과위원회 구성원 10명 중 9명이 위촉된 민간 위원이라는 점에서 정부의 정책적 입김에 사업성이 휘둘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수도권 발전과 같은 지방 균형발전 문제는 예타 면제를 통한 재정 지원으로 할 게 아니라 지역 기반 산업을 키우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며 “현 정부 들어 계속되는 재정 만능주의의 연속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사업성 부족 동해선 복선 전철화 사업 재추진…“사업 통과 가능성↑”
정부의 예타 제도 개편안 소식이 전해지자 각 지자체는 기존에 사업성 부족을 이유로 무산됐던 사업의 재추진에 속속 나서고 있다. 일례로 경상북도는 지난 1월 정부 예타 면제 사업에서 단선 전철화로 축소 통과된 4조원 규모의 ‘포항~삼척간 동해중부선 복선 전철화 사업’을 다시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경상북도는 앞서 예타 면제 판정을 받은 동해중부선 단선 전철화를 추진하면서 복선 전철화 사업을 함께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경상북도 관계자는 “그동안 예타 심사 시 경제적 타당성 분석 결과가 결정적 영향을 미쳐 비수도권에서는 SOC 등 사업추진 자체가 불가능해 국가균형발전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며 “이번 개편안에 비수도권의 경우 경제성 평가 비중을 낮추는 대신 균형발전 비중을 높여 필요한 대형사업 추진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희망적으로 내다봤다.
앞서 경상북도는 시대에 뒤떨어진 단선비전철로 추진 중인 동해중부선 철도를 복선전철로 개선하는 사업을 정부의 예타 면제 후보사업으로 요청했지만 당초 계획했던 복선화가 아닌 단선으로 축소돼 예타 면제를 받았다. 총사업비가 4450억원 규모인데 반해 비용 대비 편익(B/C)에서 0.59, 종합평가(AHP)에서 0.468이라는 낮은 성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미 동해중부선 단선 전철화 사업 단계에서부터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했던 사업을 재추진하는 것이다.
경상북도의 이러한 움직임에 지역 정치권과 시민단체는 크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지자체가 사업 재추진을 하게 된 결정적 배경인 정부의 예타 제도 개편안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문재인정부가 예타의 본 목적인 ‘무분별한 국책사업으로 인한 국민들의 혈세 낭비를 막자’는 취지를 버린 채 정부 입맛에 맞는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예타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경북 포항을 지역구로 둔 자유한국당 김정재 의원은 “교통 오지에 사는 국민에게 당장 시급한 것은 남북철도 연결 사업이 아닌 집 앞 도로망의 구축이다”며 “수십조원의 사업을 예타 없이 진행하면서 지역의 숙원사업을 뒤로한 채 정권의 숙원사업을 끼워 넣었다는 것은 결국 정부 잇속을 챙기겠다는 꼼수다”고 지적했다.
정침귀 포항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은 “정부가 지역사업에 대한 예타를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무분별한 예타 면제나 예타 통과는 추후 지역에 부메랑이 돼서 날아올 수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지역에 필요한 사업이라도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 결정해야지 선심성 예타 면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지역주민들도 경상북도의 사업 재추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동해선 ‘포항~영덕 구간’을 다니는 무궁화호에서 만난 김진호 씨는 “지금도 크게 불편함 없이 이용하는데 굳이 최신식 전철로 구간을 바꾸는 게 개선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역시 무궁화호에서 만난 유진선 씨도 “동해선 전철화가 금방 시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열차를 이용해 다니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다”며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것도 아닌데 무턱대고 전철화를 추진한다면 결국은 그게 다 다 우리가 낸 세금낭비 아니냐”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가뜩이나 경기도 안 좋아 힘든 상황에서 앞으로 세금을 더 내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된다”고 우려했다.
[이승구 기자 / 판단이 깊은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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