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둠이 내리자 성벽 위에 횃불이 올랐다. 이때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한 떼의 군마가 평양성 서쪽의 다경문(多景門) 앞에 당도했다.
“어서 문을 열어라!”
수문장이 횃불을 들고 살펴보니 무리 속에 왕제 건무의 모습이 보였다. 수문장은 황급히 성문을 열었다. 밝은 곳에서 드러난 건무의 갑옷에는 생생한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뒤를 따르는 군사들의 형편도 다르지 않았다.
“곧 적이 쳐들어올 테니 경계를 강화하라.”
건무는 수문장에게 단단히 이른 후에 부장 연사를 불러 은밀히 명했다.
“너는 즉시 군사를 이끌고 외성에 있는 영명사(永明寺)로 가서 매복하라.”
날이 밝은 후 성벽 아래를 내려다본 고구려 군사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어느새 다경문 앞에는 수군이 새카맣게 포진하고 있었다.
건무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별다른 동요 없이 침착했다. 그는 아장 풍잠(豊岑)을 불러 작전을 지시했다.
명을 받은 풍잠은 3천의 기병을 이끌고 성문으로 나아갔다.
“문을 열어라!”
성문이 열리자마자 풍잠은 창을 앞세우고 뛰어나갔다. 기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뒤따랐다. 고구려군이 갑자기 성문을 열고 튀어나오자 수군 진영에서 큰 동요가 일었다.
풍잠은 곧바로 총관이 있는 본진을 향해 말을 달렸다. 좌영의 염차와 우영의 현욱이 달려나와 그를 막았다. 풍잠은 고구려 철기병의 맥을 잇는 용장이었다. 그의 기마술은 신기에 가까웠다. 말 위에서 펼치는 창술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펼치는 동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현란했다. 사람들이 그를 비잠(飛岑)이라 부를 만했다.
풍잠은 앞을 막아서는 수나라 군사를 가볍게 베어 넘기며 내호아의 깃발 쪽으로 향했다.
“누구 앞이라고 멋대로 날뛰느냐?”
거대한 체구의 현욱이 족히 열 자는 돼 보이는 장창을 들고 막아섰다.
풍잠은 가볍게 냉소를 지었다.
“내가 가고자 하면 못 갈 곳이 없고, 하고자 하면 못 할 일이 없다. 너 따위가 어찌 참견하고 나선단 말이냐. 너희 우두머리를 데려오너라.”
현욱은 화가 치밀어 올라 귀밑까지 벌게졌다. 이제껏 자신의 앞에서 이처럼 담대한 말을 늘어놓는 자를 본 적이 없었다. 8척 장신인 데다 보통 사람의 허리둘레를 능가하는 팔뚝, 심하게 튀어나온 광대뼈와 깊이 팬 눈을 보면 웬만큼 담력이 세다고 자부하는 자도 오금이 저릴 것이었다.
현욱은 장창을 휘두르며 풍잠에게 달려들었다. 황소 같은 체격과는 달리 몸놀림은 나무를 타고 오르는 원숭이처럼 민첩했다.
그는 어느새 풍잠에게 다가가 얼굴을 향해 장창을 비스듬히 날렸다. 입을 잘못 놀린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런데 손에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았다. 현욱은 제풀에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말 위에서 떨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고삐를 잡고 버텼다.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황급히 앞을 보니 풍잠은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현욱은 부끄러워 온몸이 달아올랐다.
현욱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자 염차가 풍잠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는 회수 근처 서성 출신으로 현욱과는 동향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군문(軍門)에 투신해서 오랜 세월 동고동락해 온 막역한 사이였다. 염차는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오기와 근성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몸이 날랠 뿐 아니라 한 쌍의 도끼를 잘 썼다.
염차는 풍잠의 허리를 노리고 도끼를 휘둘렀다. 동작이 신속하고 날카로웠다. 풍잠은 황급히 허리를 꺾어 도끼를 흘려보냈다. 움직이는 말 위에서 몸을 뒤로 젖히고 온전히 다리로만 버티는 것은 엄청난 기술이었다. 고구려 장수는 날렵하게 몸을 일으켜 세운 후 장창으로 상대를 찔렀다. 염차는 간신히 날아오는 창을 피했다.
현욱은 풍잠에게 놀림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틈을 노려 공격에 합류했다.
풍잠은 두 사람의 협공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공격을 받아넘기고는 침착하게 상대의 허점을 찔렀다.
본격적으로 합이 이루어지자 세 사람은 각기 자신의 장기를 발휘했다. 풍잠이 부드러운 창 놀림으로 두 사람을 괴롭힌 데 비해 염차는 영리하게 치고 빠지면서 빈틈을 놀렸고 현욱은 쇠도 자를 듯한 힘으로 풍잠의 기세를 꺾었다.
장수들이 서로 어울려 싸우는 모습은 마치 굿판을 연상시켰다. 깃발이 흔들리고, 풍악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제물이 바쳐지고, 그 앞에서 무당이 칼과 방울을 흔들며 굿을 하는 모습처럼 흥겨웠다.
양편의 군사들은 앞날의 번영을 비는 당주(堂主)처럼 자신의 편이 이기기를 빌었다.
합이 이어질수록 수나라 장수들이 불리해지고 있었다. 두 명의 장수가 적장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자 내호아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저들의 패배로 끝날 일이면 죽어도 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지면 적군의 사기가 오를 테고, 그리되면 고전을 면키 어려웠다.
내호아는 지체하지 않고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수군들이 쇄도해 들어가자 팽팽했던 균형은 일시에 무너졌다. 고구려군은 필사적으로 수군의 공격에 저항했지만 계속 성 쪽으로 밀려났다.
두 적장과 싸움에 몰두했던 풍잠은 사세가 불리해진 것을 깨닫고 발을 빼려 했다. 하지만 염차와 현욱은 그가 물러설 틈을 주지 않았다.
현욱은 풍잠이 달아날 낌새를 보이자 재빨리 퇴로를 막아섰다. 염차는 조급한 마음에 창 놀림이 어지러워진 상대의 허점을 공략해 갔다.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수군의 공격에 겁을 먹은 고구려 기병들은 대열에서 벗어나 제각기 살 길을 찾아 달아났다. 기세가 오른 내호아는 무섭게 군사들을 몰아쳤다. 풍잠의 주위에도 수나라 군사들이 모여들었다. 여차하면 공격할 태세였다.
풍잠은 마지막 한 수를 쓰기로 했다. 그는 창을 전면으로 곧게 세운 채 현욱을 향해 힘차게 내달렸다. 창끝의 방향이 적장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어떤 방어도 생각지 않는 순수한 공격 그 자체였다.
풍잠이 무방비로 무섭게 달려들자 현욱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움찔했다. 기가 꺾인 상태에서 파고드는 창끝을 보니 공포감이 밀려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상대가 달려오는 선상에서 두세 발자국 물러났다. 풍잠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빠져나갔다.
현욱은 적장이 지나쳐 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꾀에 속아 넘어갔음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같이 죽을 각오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지만 이미 그물에 갇혔던 맹수가 달아나 버린 후였다.
풍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을 향해 말을 달렸다. 이미 싸울 의욕을 잃은 고구려 군사들도 성문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수군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맹렬히 추격했다.
평양성에서는 도망쳐 오는 군사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뒤쫓는 적군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군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문을 닫으려 했을 때는 이미 적군이 성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양국의 군사가 뒤섞이며 성문 주변은 아수라장이 됐다. 그 틈에 내호아는 본대를 이끌고 성문을 점령해 버렸다.
졸지에 성문을 빼앗긴 고구려군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군은 숨돌릴 여유를 주지 않고 계속 몰아붙였다.
평양성은 외성(外城)과 중성(中城)·내성(內城)으로 나뉘어 있었다. 외성의 성문을 통과했다고 해도 왕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직 지나야 할 관문이 많았다.
외성을 지키고 있던 고구려 군사들은 수의 대군이 성 안으로 몰려들자, 남쪽의 정양문(正陽門)과 함구문(含毬門)을 통해 중성으로 피한 후 문을 굳게 닫았다.
외성을 빼앗은 내호아는 중성과 내성 또한 곧 함락시킬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일단 외성에서 밤을 보낸 후 전열을 정비하여 단번에 중성과 내성을 돌파할 생각이었다.
날이 저물자 온종일 전투하느라 파김치가 된 군사들은 성민이 떠나 텅 빈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
평양성의 외성은 서민(庶民)들이 주로 사는 지역으로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구획돼 있었다. 사이사이에 길이 곧게 뻗어 있고, 길가에 가로수들이 줄을 맞춰 서 있는 모습이 잘 정돈된 느낌을 주었다. 한 구역에 들어선 집이 어림잡아도 수만 채에 이르렀다. 이것만 봐도 평양성이 얼마나 번화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집들은 규모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소담하고 정결했다. 백성의 모습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수군의 침입 소식을 듣고 모두 중성으로 대피한 듯했다. 수나라 군사들은 가지고 온 군량을 아끼기 위해서 집집이 식량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았다. 하지만 어찌나 철저하게 챙겨 갔는지 찾은 것이라고는 겨우 곡식 몇 자루와 닭 몇 마리 정도였다.
수나라 군사들은 오랜 항해로 말미암은 피로에다 외성을 점령했다는 자만심이 겹쳐 정신이 해이해졌다. 인가 약탈이 끝난 후 저녁을 해 먹은 그들은 잠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파수를 보던 군사들의 시선은 온통 정양문과 함구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혹시라도 고구려 군사들이 성문을 열고 나와 기습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새벽녘이 되자 세상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피워 놓은 화톳불의 불씨는 사그라졌고, 보초를 서던 군사들도 선 채로 졸고 있었다. 그들은 간간이 중심을 잃고 놀라서 깨기는 했지만 주변이 조용한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졸았다. 평양성은 언제 전투가 있었나 싶게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이때 어둠 속에서 발소리를 죽이며 움직이는 한 무리의 그림자가 있었다. 무리는 점점 그 수가 늘어나더니 순식간에 길을 가득 메웠다.
앞선 사내가 횃불을 받쳐 들며 뒤따르는 자들에게 말했다.
“불길이 일고 북소리가 울리면 수나라 졸개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올 것이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베어라.”
불빛에 비친 얼굴은 바로 건무의 부장 연사였다. 그는 왕제의 명을 받고 영명사에 숨어 있다가 수군이 방심한 틈을 타서 기습을 감행하려는 것이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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