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5’ 병원에서 시작된 전공의 연쇄 이탈이 21일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대형병원은 소속 의사 중 레지던트와 인턴 등 전공의 비율이 30~40%에 육박한다. 이들이 근무지에서 대거 이탈하면서 의료계가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수련 명목으로 시간당 최저임금에 달하는 임금만 지급해도 굴러가던 상급 의료체계의 허점이 또다시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동안 주치의 중심으로 ‘전공의’ 자리에 ‘전임의’를 뽑아 의료체계 안정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왔다. 하지만 이렇다 할 시정조치 없이 이번 전공의 집단행동을 맞은 것이다.
‘전공의 노동력 쥐어짜기’로만 이어진 상급 의료체계의 구조적 문제가 이번 의료대란의 시발점이라는 주장이 2020년 전공의 파업 당시 사정들과 맞물리면서 최근 힘을 얻고 있다.
지방거점병원의 한 필수과 전임교수는 “전공의 월급은 평균 400만 원 선으로 현재도 주 100시간 이상 병원에 머물면서 의술을 배운다”며 “고급 수술은 주치의와 같이 수술방에 들어가서 하나하나 눈으로 보고 익히는 ‘도제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초저임금과 초고강도의 24시간 업무를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전공의 ‘주 80시간법’이 생기면서 이들이 퇴근해버리면 수술방 공백 문제가 불거졌고 다시 펠로우 등이 대체되면서 의료 불안정성이 높아졌다”며 “월 1000만 원 정도 줘야 하는 전임의 체제로 전환할 것을 이전부터 주장했으나 병원들은 ‘돈’ 문제를 거론하며 차일피일 미뤄왔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사실상 응급의료체계는 전공의·전임의부터 교수까지 모두 ‘번아웃’으로 녹초가 된 상황에서 굴러가는데 가장 말단이 무너지니 그대로 붕괴하거나 마비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결함을 지닌 것”이라고 분석했다.
‘소모품 삶’에 지친 전공의… 의·정대립 때마다 ‘총대’
정부 ‘사법권’ 적용 대응에도 “돌아갈 이유 없다” 강경
전공의 의존 덜한 2차 종합병원은 의료파업 혼란 없어
결국 상급종합병원 의료체계의 불균형이 전공의 의존도를 심화시킨 결과 이번 ‘의료대란’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대목동병원 3년 차 응급의학과 전공의는 의료진에게 보낸 글에서 전공의의 고강도 노동현실을 가감없이 전했다.
그는 “아는 것은 적고 환자는 많으며 낮밤은 수시로 바뀌고 끝은 보이지 않고 휩쓸리듯 하루하루를 버텨내기만 했다”며 2년 차에는 권역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경증환자들, 그들을 이송해오는 119 대원들, 콜해도 내려오지 않는 타과 선생님들로 매일 퇴사를 고민할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응급실은 하루에도 몇번씩 죽음을 마주하는 곳으로 더 많은 환자를 위해 감정없는 기계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정이 이런데도 전공의들은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말자며 필수의료의 한 귀퉁이를 3년간 지켰다”며 “내가 한 일은 삶을 소모해 환자를 살린 것밖에 없는데 정부는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고 주장했다.
21일 보건 의료계에 따르면 전체 의사 중 전공의는 1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날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 발표에 따르면 20일 오후 10시 기준 주요 100개 수련병원의 근무 현황을 파악한 결과 소속 전공의 중 약 71.2% 수준인 8816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또한 근무지를 이탈한 전공의는 약 63.1%인 7813명으로 집계됐다. 근무지 이탈이 확인된 전공의 6112명 중 이미 업무개시명령을 받은 715명을 제외한 5397명의 전공의에게 업무개시명령을 발령했다.
절대다수 전공의는 대정부 투쟁 강경 기조를 이어가겠다는 방침이다.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비상대책위원회는 전날 서울 용산 대한의사협회(의협) 회관에서 긴급 임시대의원총회를 개최하고 정부가 이달 들어 연이어 발표한 필수의료 4대 정책을 재고하고 2000명 의대 증원 계획을 전면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4대 정책이란 △의사인력 확충 △지역의료 강화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보상체계 공정성 제고를 일컫는다.
또한 과학적인 의사 수급 추계를 위한 기구를 설치한 뒤 증원과 감원을 같이 논의하고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과 불가항력의 의료사고에 대한 법적 부담 완화를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요구했다.
반면 정부는 한 치도 물러설 뜻이 없어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의사 증원이 필수의료 붕괴를 막기 위한 필수조건임은 명백하다”면서“2000명 증원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확충 규모”라고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그러면서 △지역 필수의료·중증 진료에 대한 정당한 보상 체계 확립 △사법 리스크 완화 등의 사태 해결 대책을 논의했다. 보건복지부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엄정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한 상태다.
복지부는 현재 출근 확인 안 된 831명 전공의에게 즉시 복귀하라는 ‘최후통첩’ 성격의 업무개시명령을 내렸다. 박민수 복지부 2차관은 정부세종청사 브리핑에서 “병원 기능이 상당히 마비되고 환자가 사망하는 등 중대한 위해가 발생하면 법정 최고형까지 갈 것”이라며 “정부는 기계적으로 법을 집행하겠다”고 밝혔다.
20일 기준으로 의사 집단행동에 따른 환자 피해는 수술 취소 25건을 포함해 모두 34건으로 복지부에 접수됐다. 1년 전 자녀 수술을 예약하고 보호자가 휴직했으나 입원이 지연된 사례까지 빈번했다.
3차 상급종합병원과 달리 2차 종합병원은 전공의가 맡는 수술 마취 등을 마취 전문의가 맡는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어 이번 의료대란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수도권 종합병원 전문의는 “전공의가 있는 대형병원은 큰 수술·위급 수술·응급 환자들을 많이 받는데도 전공의라는 싼 인력이 필요했겠지만 종합병원은 전공의가 거의 없으며 간호PA(진료보조)들이 그 역할을 일정 부분 감당하고 있어 혼란이 크지 않다”고 밝혔다.
한편 정부는 ‘의료대란’에 대응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응급의료체계 구축에 나선다. 일단 상급종합병원은 입원·중증진료를 중심으로 진료기능을 유지한다. 또한 전국 400곳 응급의료기관이 24시간 비상진료체계를 운영한다. 정부 관계자는 “증원 규모로는 협상하지 않을 것”이라며 오래 버텨야 이기는 싸움으로 인식한다”며 장기전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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