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8년 여름 경기도의 한 작은 마을, 나는 몰락한 양반집에서 태어난다. 가난에 허덕이던 부모님은 신동이라 소문난 나를 양자로 입양 보낸다.
양아버지는 중추부판사 이호준 대감이었고 난 25세에 과거에 급제한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는 청나라를 끌어들여 친일 개화파를 3일 만에 쓸어 버린다.
경복궁에선 무당의 춤과 꽹과리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내수사(內需司)에 있는 재물로는 감당이 안 돼 호조와 선혜청의 공금을 탕진한다. 당오전 화폐를 마구 찍어 물가가 치솟자 명성황후는 대놓고 매관매직을 일삼는다. 청년이었던 나는 침묵했다.
1887년 태평양 건너 도착한 미국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자유를 경험한 나는 3년 뒤 성균관 대사성에 발탁되어 초등교육을 의무화하고 근대적 교사 양성을 주도하는 한편 서양학과를 신설한다. 그런데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난다. 썩어 빠진 나라꼴에 분노한 백성이 횃불을 든 것이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주춤해지자 명성황후는 내가 속한 정동파의 세력을 등에 업고 친일개화파를 물리치며 부활한다. 그러자 일본은 1895년 야쿠자 칼잡이들을 보내 황후를 살해한다. 불안에 떨던 고종은 나의 도움으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하는데 이 기간 동안 경원광산·종성광산·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산림채벌권 등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조선 백성은 무능한 왕 때문에 속국의 백성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1896년 나는 독립협회를 설립한다. 독립문을 세우고 강연과 토론회, 신문과 잡지 발행 등 근대적 지식 사업으로 백성을 계몽한다. 그러나 미국과 친한 나는 러시아의 압력을 받은 고종에 의해 파직되며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된다. 충성했던 임금에게 버림받은 배신감에 나는 기생들과 나졸 100명을 동원해 유람여행을 떠나며 국고 4000냥을 탕진한다.
1904년 한반도와 만주를 두고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무능한 왕·나약한 국가·뒤떨어진 사회 수준, 조선이 스스로 일어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이 승리하자 고종은 다시 한 번 미국에 기대려고 나를 기용한다. 하지만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미국은 조선을 도와주지 않는다.
나는 친일파가 되기로 결심한다. 어차피 한반도가 어떤 나라에 복속되어야만 한다면 결국 일본밖에 없다.
나라는 개판인데 영친왕은 유럽 여행은 물론 세계일주를 다니며 골프를 즐겼다. 의친왕의 취미는 자동차 드라이브로 포드 자동차 가격은 4000원, 쌀 600가마 가격이었다. 순종의 캐딜락은 2만 원이었다.
내 손엔 칼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고종을 향해 “황제 자리를 내놓으라”고 고함쳤다. 무능했던 임금, 하지만 내가 충성했던 임금. 그러나 나를 버렸던 임금. 그래서 내가 버린 임금. 임금을 버리자 다른 것들은 너무 쉽게 버려졌다.
그렇게 나는 을사조약·정미7조약·기유각서를 통해 하나하나 대한제국의 권리를 일본에 넘겨줬다. 마침내 1910년 8월22일 한·일합병조약으로 대한제국을 넘겨준다. 일본은 내게 총 25만 원의 은사금을 하사했다. “무능한 왕 아래서 살아남을 방법은 이 길밖에 없어!” 나는 고함쳤다. “숭고한 명분으로 겪는 전쟁보다 굴종을 통해 얻은 비겁한 평화가 더 낮지 않은가?”
△6·25전쟁의 상흔이 할퀴고 간 1960년대 경상북도 영양군 어느 마을. 아버지는 계모임을 만들어 계주가 된다. 계원들은 어려운 시골 살림에도 곡식 팔고 품을 팔아 약속한 날짜에 꼬박꼬박 곗돈을 부었다. 그런데 그 달에 당첨된 계원은 이자를 두둑하게 주겠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목돈을 맡긴다. 돈 냄새만 맡고 다시 돌려준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마지막 계원이 곗돈을 타자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데리고 어디론가 떠난다. 영양군을 벗어나 안동군 예안면 산골짜기로 야반도주한 것이다. 그곳에서도 아버지의 눈빛은 빛난다. 동네에서 가장 큰 담배조합에 취직한 것이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지급할 담배 수납금을 높은 이자를 쳐 주겠다며 뭉텅이 돈을 빌린다.
두둑한 이자를 준다는 말에 농부들은 너나없이 돈을 맡긴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 돈을 몽땅 들고 어디론가 떠난다. 경기도 성남이다.
사실 안동 예안면으로 야반도주해 살던 나는 중학교 친구 서너 명과 어울려 다니다가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하던 중 재수없게 여학생이 죽는다. 그리고 10년형을 선고받고 소년원형무소에 들어가 공장일을 배운다. 나는 중·고등학교 다닐 나이에 징역살이를 한 소년공이었다. 중·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패스해 대학에 진학한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전과 기록을 세탁하고 과거를 깨끗이 정리한다. 영특한 머리는 이렇게 쓰는 것이다.
한 줌도 안되는 권력을 쥐고 단군 이래 최대 민관합동 서민착취 대장동 사업을 벌이고 최측근 5명이 자살해도 ‘모르쇠’로 버티는 사악함…. 나의 사악함은 지존급이다. 나는 2017년 ‘대한민국 혁명하라’는 책을 쓴다. 그리고 이런 글을 남긴다. “아무리 비싸고 더러운 평화도 이긴 전쟁보다는 낫다.”
110여 년 전 대한제국을 일본에 넘기며 한 남자가 내뱉는 말과 어쩌면 이리도 같은가. “숭고한 명분으로 겪는 전쟁보다 굴종을 통해 얻은 비겁한 평화가 더 낮지 않은가”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