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경제가 위기에 빠졌다. 늘 위기였다고 하지만 현재의 위기는 차원이 다르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대한민국 주력 기업들의 수출에 빨간불이 들어 왔다.
이를 반영하듯 한국은행은 우리 경제성장률이 2030년 대에는 0%, 2040년에는 마이너스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성장이 둔화되는 정도가 아니라 경제가 쪼그라드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윤희숙 전 한국개발연구원(KDI) 재정·복지정책 연구부장은 신간 ‘콜드 케이스’를 통해 “이 난관에서 벗어나려면 70여 년간 ‘폭탄 돌리기’ 하듯 미뤄 온 장기 미해결 과제들부터 하나씩 해결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경제 성장 가로막는 주범 ‘국회의원’
콜드 케이스(Cold Case)란 장기 미제로 남은 범죄 사건을 일컫는 말이지만 우리 경제 및 사회정책에도 그런 해묵은 과제들이 있다는 뜻이다.
정권을 막론하고 미루고 미루다 한국경제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간 5가지 장기 미해결 과제는 △경제 운영체제 △노동시장 △국민연금 △의료시스템 △교육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이다.
이것들을 계속 방치한다면, 탈피를 미루어 온 갑각류처럼 제 몸을 보호해 주던 껍질이 오히려 성장을 옥죄는 감옥이 되고 말 것이라며 저자는 과감하게 새판을 짤 것을 제안한다.
첫 번째 해결 과제는 ‘규제’의 덫에 빠진 경제 운영체제다. 2023년 기준 글로벌 100대 유니콘 기업 분포를 보면 △미국 59개 △중국 12개 △인도 6개에 비해 우리 기업은 토스 한 곳뿐이다. 이게 다 쓸데없는 규제 탓이다.
저자가 꼽는 ‘규제의 빌런’이 둘 있다. 하나는 공무원이다. 민간경제가 잘 성장하도록 지원자 역할을 해야 함에도 그들은 각종 ‘규제’를 자산 삼아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또 하나의 빌런은 국회의원이다. 간신히 규제 하나를 없애고 나면 국회에서 몇 배의 규제를 만들어 낸다. 심지어 품질마저 엉망이다. 그 결과 경제는 동맥경화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능한 사람이 부지런하면 유능한 사람이 게으른 것보다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4년간 일본은 의원 1인당 법안 발의 건수가 0.6개에 불과하다. 영국은 1개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79개나 된다. 의원 1인당 법안 심의 건수도 82개에 이른다. 마구 만들고 마구 통과시키니 규제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그런데도 무조건 법안 발의를 많이 하면 열심히 일하는 의원이라고 평가하는 이들이 있다.
노동시장 간 장벽 없애는 게 최우선
둘째는 ‘노동시장’ 개혁이다. 한국은 임금과 고용 안정성이 둘 다 높은 1차 노동시장과 모두 불안정한 2차 노동시장으로 나뉘어 있다. 대략 15대 85의 비중이다.
고용 안정성에 있어 전자가 경직되어 있다면 후자는 지나치게 유연하다. 특히 1차와 2차 노동시장 간의 장벽이 너무 높아, 2차 노동시장에 한 번 진입하면 1차 노동시장으로 옮겨가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저자는 그 장벽 사이의 틈을 내는 게 우리 노동시장의 가장 큰 과제라고 말한다.
이는 큰 틀에서 볼 때 사회적 이동성과 관련이 있다. 누구든 현재 위치에서 얼마든지 올라갈 수 있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다는 마음이 혁신을 만들고 한국을 도약하게 한다.
“2014년 8월에 발표된 서울대 유영순 교수팀의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9.2%가 장기적인 울분 상태에 놓여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30대 젊은층에서 가장 비중이 높았다는 것은 사회적 이동성에 대한 젊은층의 믿음이 붕괴됐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저자는 비정규직 운용에 있어 일본과 독일처럼 탄력적으로 운영하되 고용 기간 외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엄격히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외에도 베이비부머 세대가 퇴직 이후 계속 일할 수 있도록 고용 환경을 개선할 것과 최저임금 결정구조를 개혁해 노동시장을 보다 수용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약품 편법 해결하고 수련 비용 사회화해야
셋째로 해결해야 할 것은 ‘의료시스템’ 개혁이다. 현재 의대 정원을 둘러싼 의정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저자는 의료시스템 개혁을 단지 의대 정원 문제로 좁게 봐서는 풀리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번에 극단적으로 드러난 취약한 정책 리더십과 구멍 난 파트너십은 그간 정부가 싼값에 의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편법을 제도화해주면서 이해관계자들을 강압적으로 찍어 눌러 왔던 지난 20여 년간의 곪아 온 상처가 터진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편법이 의약품 정책이다. 정부는 낮은 건강보험 수가 대신 의약품을 통해 의사들의 소득보전의 길을 살짝 열어놓았다. 오래전 의약분업이 현실화됐음에도 여전히 간납업체 등 각종 편법이 난무하는 원인이 됐다.”
또한 전공의들을 ‘갈아 넣어’ 운영했던 대형종합병원들의 의사 수련 비용 또한 마땅히 사회화해야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일례로 미국이나 캐나다의 병원은 전공의 수련 교육을 총괄하는 의사는 전체 근무시간의 80%를, 지도 책임을 맡은 의사들은 40%를 수련 교육에 할당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 의료시스템은 의사 개인의 선의와 희생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의견 속에 답 있다
넷째로 손봐야 할 것은 노후 삶의 안정과 행복을 좌우하는 ‘국민연금’이다. 연금 고갈에 대한 경고가 끊임없이 울리고 있지만 20년 넘도록 그 어떤 정부도 손대지 않고 있는 최강 난이도의 장기 미결 과제 중 하나다.
“1998년 9% 인상을 마지막으로 이후 26년간 한 번도 보험료 인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한테서만 안 터지면 된다는 심정으로 ‘폭탄 돌리기’를 해온 결과 국민연금 재정은 엉망이 됐다. ‘세대 간 도적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국민연금개혁의 방향과 방법은 그간 선진국들이 앞서 노력한 여러 사례 속에 이미 어느 정도 답이 나와 있다. 대표적인 게 모수개혁과 구조개혁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1990년대부터 전격적인 연금개혁을 추진했던 스웨덴은 일단 책임 있는 논의기구에서 ‘개혁의 상위 원칙’을 논의한 후, 그 내용을 1992년에 공개적 논의에 부쳤다. 그런 후 개혁 방향에 관한 포괄적 입법부터 1994년에 단행했고, 구체적 사항은 정당 대표와 전문가 등 책임 있는 소수들이 안을 만들어 순차적으로 입법했다.”
스웨덴의 연금개혁은 무엇에 대해 국민의 생각을 물을 것인지, 공적 책임을 맡은 이들은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케이스다.
마지막 교육개혁에 관해 저자는 빅뱅 수준의 시스템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학교가 자유로워질 것을 주장한다. 수능은 기초 학력 테스트에 만족하고 대학별 교육 철학에 맞는 학생을 선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100명이 한 줄로 서면 한 명만 1등이지만 100명이 백방으로 뛰면 100명이 다 1등이다.
저자는 우리 경제의 성장판을 닫아 온 ‘콜드 케이스들’을 하나하나씩 해결하려면 무엇보다 지도층 스스로 모범을 보이면서 슬기롭게 공론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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