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천된 김정일의 동창생들
1980년대 초반 중앙당 간부들 중에는 김정일의 모교인 김일성종합대학 동창생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중 ‘김정일의 김일성종합대학 동창생’이라는 점을 악용해 권세를 부리고 부정부패를 일삼다가 적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내용을 보고받은 김정일은 그들을 엄벌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따라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뿐 아니라 그들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다른 동창생들까지 직위 해제시켜 중앙당에서 내보낸 적이 있었다.
당시 중앙당 연락부 7과 과장도 김정일의 대학 동창생 가운데 한 사람이어서 과장직에서 해임되어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교수로 좌천되었다. 연락부 7과장이 해임되자 공작조장 박철만도 원래 계획대로 유럽 및 미주 공작을 전담하던 당시의 연락부 7과로 가지 못하고 대남 직접 침투 공작과로 배치된 것이다. 그래서 불평불만이 많았다.
이처럼 처음부터 박철만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진 상태에서 박철만과의 공작조 생활이 시작되었다. 거기에다 하필 그의 교육프로그램에 맞춰 이미 받았던 교육과 훈련을 다시 받아야만 했던 나로서는 이래저래 손해가 막심했다.
상대방에게 어떤 첫인상을 주느냐가 대인관계의 성패를 결정지을 수 있다. 그래서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그에 대한 첫인상이 좋지 않았음은 물론 대남공작과에 배치된 후부터 지속된 그의 불평은 같은 공작조로서 우리 둘 사이의 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 한 번의 종합판정 훈련
박철만과 공작조를 편성한 지 1개월쯤 되는 1985년 10월 초 나는 조장 박철만과 함께 금강산 관광을 겸한 종합판정 훈련을 진행했다. 먼저 금강산 관광을 한 다음 강원도 원산과 문천·법동 일대에서 10일에 걸쳐 반합법 및 비합법 훈련을 하는 일정이었다.
나로서는 이미 6월에 종합판정 훈련을 받았고 한 해에 두 번씩이나 힘든 훈련을 해야 했으니 정말 짜증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박철만과 같은 공작조라서 어쩔 수 없었고 금강산 관광을 시켜 준다니 그런대로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박철만과 나, 훈련 담당 지도원은 열차를 타고 평양역을 출발해 원산역에 도착한 후 다시 승용차로 갈아타고 금강산으로 가서 관광부터 했다. 나는 그때 금강산이 처음이었다. 그나마 공작원을 했기 때문에 그때 다녀올 수 있었고 그로부터 2년 후 한 번 더 다녀왔다.
북한에서 금강산 근처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지역 주민들은 금강산 관광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물론 금강산이 휴전선과 민간인통제선(민통선) 지역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북한 당국이 주민들이 관광이나 휴가 목적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민들에겐 그런 곳에 놀러 다닐 만큼의 시간적인 여유도 없고, 교통수단 또한 낙후되어 있다.
아름다운 10월의 금강산, 그리고 특별대우
10월의 금강산은 참으로 아름답다. 금강산의 아름다움과 황홀한 절경은 표현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도저히 몇 마디의 말로 다 형언하기가 힘들다.
내장산이나 설악산 등이 가을 단풍으로 유명하지만 금강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붉게 물든 금강산의 단풍과 아름답고 신비한 절경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견줄 곳이 없을 것이다. 지금은 남한에도 금강산 관광을 다녀온 사람들이 많으니 필자의 말을 이해할 것이다.
공작원들이 금강산이나 백두산 등에 관광을 가면 특별대우를 해 준다. 일반 주민과 달리 그들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호텔을 이용한다. 금강산에 갔을 때도 원산 시내에 있는 송도호텔과 외금강에 있는 금강산호텔에 묵으면서 주로 외금강 일대를 돌아보고 금강산 온천에서 온천욕도 하면서 3박4일간을 즐겁게 보냈다.
북한에서는 당시 금강산의 3개 구역 가운데 외금강 일대와 관동팔경의 하나인 삼일포가 있는 해금강의 일부 지역만 보여 주었다. 내금강 일대와 해금강의 대부분 지역은 군사기지와 휴전선 지역이라는 이유로 일반인들에게는 공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도 외금강 일대를 위주로 관광했다.
세상 만물의 모습을 그대로 바위에 옮겨 놓았다는 만물상과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왔다는 천선대, 옥구슬처럼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고 하는 옥류동 계곡, 9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구룡연과 장쾌한 구룡폭포, 금강산에 내려왔던 8명의 선녀가 목욕을 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상팔담,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이 봉황새의 꼬리를 닮았다는 비봉 폭포 등 외금강 일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옛날 신라 화랑들이 하루만 쉬어 가려고 왔다가 경치가 너무도 빼어나게 아름다워 3일 동안 묵었다고 하여 ‘삼일포’라고 이름지었다는 삼일포 호수를 돌아본 다음 온정리에 있는 금강산 온천에서 온천욕도 했다.
사진도 마음대로 찍을 수 없는 공작원
당시 우리와 동행했던 훈련 담당 이 지도원은 원래 북한군 군관(장교) 출신이었다. 그는 항공육전대(공수부대)에서 군복무를 하다가 남한의 육군사관학교와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상좌(중령과 대령 사이) 계급장을 달고 대학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다가 당시 연락부에서 공작원들의 교육과 훈련을 담당 지도하던 6과 지도원으로 소환되었다. 지도원으로 임용된 지 얼마 안 되는 신참 지도원이었고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준 것은 물론 적지 않게 고생도 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사진 문제다. 그는 금강산 관광을 떠날 때 카메라를 가지고 와서 사진을 근사하게 찍어 잘 뽑아 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물론 평소 공작원들은 사진을 찍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 그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래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금강산에 갔다.
그런데 금강산에 도착하고 보니 카메라 필름이 컬러가 아닌 흑백이었고, 또 돌아와서는 30장 넘게 찍은 가운데서 고작 서너 장만 뽑아 주었다. 찍은 사진을 확실하게 책임지고 모두 뽑아 주겠다고 한 출발 전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역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내세우는 이유가 너무도 유치해서 실망이 컸다. 그는 필름을 현상하니 내가 안내원 아가씨와 같이 찍은 사진이 많았고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약혼식이나 결혼식 사진으로 생각할까 봐 뽑아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물론 모르는 사람은 사진을 보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며 사진을 찍어 준 중앙당 간부가 사진을 모두 뽑아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으면서 그런 식으로 이상한 상상을 했다니 한심하고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진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공작원으로서 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게 불가능했던 길고 긴 시간을 보낸 나로서는 금강산 관광 가서 사진을 찍어 주겠다는 지도원의 약속이 큰 기쁨이고 설레임이었다. 하지만 그의 설득력 부족한 언행들을 겪고 나서부터는 그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기지 않게 되어 버렸다.
우리는 금강산 관광을 마친 후 계획했던 대로 종합판정 훈련을 했다. 먼저 원산 시내에서 증명서 없이 남의 집에 들어가 숙식을 해결하고 열차 승차권을 구입하는 등 반(反)합법 훈련을 진행했다. 나는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원산이 고향인 친구의 집 주소를 알아 가지고 가서 그것을 이용해 훈련을 쉽게 끝낼 수 있었다.
그 후 원산과 문천의 산악 지역에서 행군과 숙영·무인 포스트 매몰 및 발굴·접선과 장비매몰 등 비합법 훈련을 계속해서 진행했는데, 첫 인상이 좋지 않았던 것과는 별개로 공작조장인 박철만과 함께 훈련하니 혼자 할 때보다는 힘이 덜 들었다. 그때가 10월 중순이었고 야외에서 숙식하면서 훈련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조장이었던 박철만은 추위에 약해 더더욱 고생했다.
719종합훈련장에서의 격술 훈련
금강산 관광에 이어 종합판정 훈련을 마친 뒤 계속해서 사상이론 교육을 받으며 생활하던 나와 조장 박철만은 1985년 12월에 초대소 지역에 새로 건설된 ‘719종합훈련장’이라고 불리는 공작원 전용 체육관에 들어가 20일간 격술 훈련을 집중적으로 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격술은 태권도와 유도·호신술 등을 결합한 종합 무술이다.
‘719종합훈련장’은 공작원들에게 격술 훈련뿐 아니라 자동차·오토바이 운전 연습도 동시에 시키기 위해 1980년대 초반에 지은 종합적인 훈련 시설로, 각종 헬스 기구와 사우나 시설 등을 갖춘 실내체육관과 투도(투검) 연습장이 있으며 여러 대의 운전 교육용 승용차와 오토바이 그리고 이를 위한 차고도 있었다.
또한 기초적인 운전 연습을 위한 운동장이 있으며 강사와 공작원들이 훈련을 받으면서 묵을 수 있는 초대소 건물 등이 있다. 이 훈련장 역시 당시 연락부 교육 전담과인 7과에서 운영하고 있었으며 훈련 지도는 격술을 지도하는 강사와 운전 훈련 강사가 각각 담당했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아버지의 특이한 이력을 알게 되면,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저와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어요. 사실 저는 아버지가 다른 친구들의 아버지들과 크게 다르다고 느꼈던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가끔 저와 동생에게 미안하다고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며 저희가 혹시라도 받게 될 어떤 불이익이 걱정되어서 하신 말씀이었나요?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저희가 어떻게 그것을 극복해 나가길 바라십니까?
아버지 : 내가 너희들에게 가끔 미안하다는 말을 한 것은, 네가 말한 대로 너희들이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면서 나로 인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어.
내가 30년간 한국에 살아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북한 출신들에게 폐쇄적이었고 불이익이 많은 것이 현실이야. 물론 그렇다고 특별히 그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탓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 그래서 너희들에게 가끔 미안하다고 했던 거야.
너희들은 한국에서 알게 모르게 북한 출신들에 대해 상당히 폐쇄적이고 불이익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해. 하지만 그렇다고 기가 죽거나 자신감을 잃지 말고 대신 남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전문적인 실력을 키우고 보다 현명하게 대처해 나간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거라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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