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빅 사태와 같은 유형은 사람 눈으로 공시를 훑어서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본지가 23일 취재한 회계법인의 기업공시 전문가는 볼빅 사태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처럼 문서 형태로 흩어진 정보를 개인이 일일이 확인하는 방식으로는 경고 신호를 놓치기 쉽다”고 덧붙였다. 사업의 내용에 기재되는 매출 및 생산 등의 추가적인 정보와 재무제표를 비교해야 정보의 왜곡을 밝혀낼 수 있으므로 XBRL을 사업보고서 전체로 확대해야 한다는 취지다.
코넥스 상장사이자 골프용품 업체 볼빅이 수년간 회계처리 기준을 위반해 재무제표를 작성·공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앞서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는 22일 조사·감리 결과를 바탕으로 볼빅에 과징금 부과와 검찰 고발, 감사인 지정(3년) 등을 의결했고 전 대표이사와 담당 임원에 대해 해임(면직) 권고 상당 조치도 함께 결정했다. 과징금 규모는 향후 금융위원회 정례회의에서 최종 확정한다.
증선위가 지목한 핵심은 ‘재고’였다. 볼빅은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재고자산 입·출고 수량을 조작해 단위당 제조원가를 과대 계상했고, 그 결과 기말 재고자산을 부풀려 재무제표를 만들었다고 당국은 판단했다. 연도별 과대계상 규모는 2017년 65억9000만원, 2018년 118억9700만원, 2019년 145억4400만원, 2020년 177억5100만원, 2021년 155억5600만원으로 파악됐다.
증선위 조치는 ‘재고’가 회계 부정의 흔한 출발점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시킨다.
공시 전문가는 “재고자산을 통한 분식회계는 매우 전형적인 수법”이라며 “재고는 자산 항목 가운데 규모가 크고, 평가 과정에 추정과 내부 판단이 많이 개입되는 영역이라 숫자를 움직이기 상대적으로 수월하다”고 말했다.
이어 “매출처럼 외부 거래 상대방과 현금 흐름이 즉시 드러나는 항목과 달리, 재고는 원가 배분과 평가 방식에 따라 자산과 손익을 동시에 조정할 수 있어 회계 왜곡의 출발점이 되기 쉽다”며 “특히 제조업이나 브랜드 기업처럼 재고 비중이 높은 회사일수록 관리와 검증이 느슨해지면 왜곡이 장기간 누적될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다.
당국은 외부감사 과정도 흔들렸다고 봤다. 볼빅이 재고 입출고 내역이 담긴 수불부(재고 입출고 장부) 자체를 실제와 다르게 작성해 감사인에게 제출했고, 이 행위가 정상적인 감사 절차를 방해했다는 설명이다. 증선위는 감사인인 안진회계법인도 재고자산 관련 감사 절차를 소홀히 해 위반 사실을 감사의견에 적절히 반영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볼빅 사례처럼 재고·원가를 건드리는 유형은 전자공시(DART)만 훑어서는 ‘조작 금액’을 곧장 특정하기 어렵다. 다만 투자자가 공시의 흐름을 따라가며 단서를 모으면 의심 지점을 좁혀갈 수는 있다.
첫째, 사업보고서·감사보고서의 재무제표 주석에서 ‘재고자산 평가’ ‘제조원가(매출원가) 구성’ ‘재고자산의 증가·감소’ 항목을 연도별로 비교하면 재고 변동이 매출·이익 흐름과 맞지 않는 구간이 드러날 수 있다. 둘째, 이후 당국 조치가 나오면 정정공시를 포함한 회사 공시에서 재무제표 수정·재작성, 전기오류수정 반영 여부가 확인되고, 감사인 지정 같은 후속 공시가 이어지며 사건의 윤곽이 또렷해진다. 셋째, 금융당국의 조사·감리 결과가 공개되는 시점에 연도별 과대계상 규모가 공식적으로 특정된다.
그럼에도 ‘왜 일반 투자자는 알아채기 어려웠나’라는 질문이 남는다.
재고자산 과대계상은 매출처럼 눈에 띄는 ‘현금 유입’이 아니라, 원가와 재고 평가라는 내부 산식에서 숫자가 바뀌는 구조라서 외부에서 직관적으로 걸러내기 어렵다. 재고 입출고 수량·단위당 제조원가 같은 기초 데이터는 기업 내부 시스템에 있고, 공시에서는 결과값만 요약해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감사인이 확인하는 수불부 자체가 조작되면, 외부감사는 ‘제출 자료의 진실성’을 상실한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재고자산 회전일수, 매출원가율, 재고 증가폭 대비 매출·현금흐름의 괴리 같은 ‘조합 지표’를 스스로 계산해 의심 신호를 찾아야 하는데, 코넥스 종목의 정보 접근성·분석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얇다는 점도 장벽으로 작동한다.
전문가들은 결국 ‘탐지 가능한 공시’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재무정보가 표준화된 태그로 구조화돼야 시장의 감시가 사람의 직감과 수작업에 머물지 않는다. 재고·원가처럼 내부 추정이 개입되는 항목일수록 비교·검증 가능한 형태로 정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볼빅 사례는 분식의 전형을 다시 보여준 동시에, 공시 체계가 데이터 중심으로 고도화돼야 한다는 과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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