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된 실정으로 부정적 평가가 높아지는 문재인정부도 어느덧 임기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다. 경기악화, 집값폭등 등 국민 생활과 밀접한 분야에서 파열음이 거세지다 보니 차기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은 그 어느 때 보다 높은 상황이다. 차기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은 자연스럽게 대선후보군에 쏠리고 있지만 아직까지 국민이 요구하는 인재상에 적합한 인물은 찾기 어렵다는 게 여론의 중론이다.
스카이데일리가 다수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에게 요구되는 대통령의 자질’을 취재한 결과, 어느 정도 의미 있는 결과가 도출됐다. 각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따라 의견이 갈리긴 했지만 대부분 이승만 전 대통령의 개척정신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정신 등을 가장 필요한 자질로 꼽았다. 동시에 새 대통령은 이들의 우수한 자질을 두루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 체제 구축한 이승만, 반대 무릅쓰고 수출강국 기틀 다진 박정희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 만연하던 양반·계급구조를 타파하고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근간을 마련했다. 그 일환으로 진행된 게 당시 지주층의 거센 반발을 샀던 농지개혁이다. 이 전 대통령의 개척정신과 추진력이 없었다면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근간으로 한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라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평가다.
한국행정학회장을 지낸 이대희 광운대 교수는 “만약 이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농지개혁을 외면한 채 지금의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국민을 농노로 만들었다면 종신 대통령은 됐을 것이다”며 “그러나 그는 국민의 어려운 삶을 안타깝게 여기고 현실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농지개혁을 결심했다”고 평가했다.
이 전 대통령은 지주계급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1949년 5월 제헌국회를 통과한 농지개혁법을 토대로 토지개혁에 나서 불과 1년만인 이듬해 5월 1차 개혁을 완료했다. 비록 북한 남침에 의한 6‧25전쟁으로 인해 중도에 지연됐지만 전란의 와중인 1951년 4월 ‘귀속농지특별조치법’을 공포하는 등 자본주의적 평등체제 구축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당시 전국적으로 농지를 분배받아야 할 농민이 153만5000명에 달했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해 농지를 경작하는 농가 △경작능력에 비해 작은 농지를 가진 농가 △순국열사 유가족 △영농력을 가진 농가 △국외에서 귀환한 농가 등 확고한 기준을 세우고 토지를 분배해 불만을 최소화하고 국가의 근간인 식량자급에 힘을 쏟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은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의 도약으로 요약된다. 박 전 대통령은 주한미군을 빼내 월남전에 파병하려는 미국 행정부에 맞서 ‘핵개발’ 이라는 카드를 꺼내 막대한 외화를 획득했고 이를 산업화 재원으로 활용했다.
이후 당시 야당의 거센 반대 속에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울산공업단지 △국방과학연구소 등을 설립해 제조업 기반을 세우는 한편 새마을운동을 통해 국민의 근로의욕을 고취시켰다.
오늘날에도 우리나라가 ‘제조업으로 먹고 사는 국가’임을 감안하면 당시 산업화 구축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도 제3세계와 같은 1차 산업 의존국가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 운동권에 몸담으며 박 전 대통령 체제에 거세게 반발했던 인사들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1970년대 초 반정부 활동을 주도하다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던 김세중 전 연세대 교수는 “한국은 박정희시대 때 산업혁명을 통해 전근대적이고 정태(靜態)적인 농업사회에서 근대적이고 동태(動態)적인 공업사회로 변모했다”고 강조했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도지사 시절 경기 북부에 고속도로를 놔 달라고 중앙정부에 요구했었다. 돌이켜보니 난 박정희의 (경부)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한 사람이었다”며 “(도지사 재임 시기) 경기도 일자리의 25%가 자동차산업과 관련된 것이었다. 나는 (박 전 대통령의) 자동차산업도 반대했었다. 내가 초로의 나이에 비로소 깨달았던 걸 박정희는 이미 1960~70년대에 알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국민 모두가 잘 사는 사회”…대한민국 민주주의 꽃 피운 김영삼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꽃을 피운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민주화 정신은 단순히 사회·정치에 국한되지 않고 경제 분야에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오늘날 사회적 화두로 자리매김한 경제민주화를 일찌감치 시도한 게 김 전 대통령인 셈이다.
우리 헌법 9장 119조는 “대한민국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면서도 “국가는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보이지 않는 손’을 강조하면서 가장 경계했던 탐욕에 의한 부작용을 억제하기 위해 숱한 비판도 겸허히 받아들였다.
1990년대 초 우리나라는 유례없는 경제호황 속에 자본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다. 동시에 필연적으로 일부 재력가들의 탈세, 비자금 등을 목적으로 한 차명계좌와 같은 자유방임주의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부패는 자본의 선순환을 막아 민생경제마저 악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김 전 대통령은 헌법이 명시한 정부의 역할에 따라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를 포함한 긴급재정경제명령을 선포했다. 해당 법안에 의해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주민등록증, 여권, 운전면허증 등 신분증 없이 은행계좌를 개설하는 건 불가능한 상태다.
금융실명제는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삼엄한 보안 속에 극비리에 이뤄졌다. 김 전 대통령은 이경식 경제부총리, 홍재형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불러 법안 준비를 지시하면서 정보가 새어나갈 시 두 사람부터 처벌하겠다고 경고했다. 이 부총리는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함께 서울 모처에서 법안 초안을 잡았으며 홍 장관도 경기도 모처에서 실국장급과 새 제도를 준비했다.
금융실명제로 인해 지하경제에 매몰돼 있던 막대한 양의 검은 돈이 양지로 쏟아져 나왔으며 관련 사범들이 줄줄이 구속돼 처벌받았다. 국고로 귀속된 검은 돈은 일자리 확충, 복지 등에 활용됐다. 당시 언론은 금융실명제가 시행된 지 약 6개월이 지난 1994년 2월 보도에서 “금융실명제 실시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증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전했다.
세 전직 대통령의 업적을 요약하면 이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법체계 확립을, 박 전 대통령은 미래세대가 누려야 할 부의 터전 마련을,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 정신의 현실 적용 등으로 귀결된다. 시민사회와 전문가들은 세 전직 대통령들이 이룩한 업적과 그 바탕이 된 자질이야말로 차기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필수 덕목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대중정부에서 문화관광부 국장을 지낸 김장실 전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의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동을 걸었던 조국근대화, 농촌의 유휴인력을 도시 공장에서 근무하게 해 (생산품을) 타국에 수출하는 노동집약적 수출산업화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며 “1962년 4700만 달러였던 수출량은 2년 뒤 1억 달러, 9년 뒤 10억 달러가 됐다. 이 와중에 도시로 나가 성공을 거둔 농촌 사람들이 많았다”고 평가했다.
주요 언론 칼럼니스트로 활동한 엄상익 변호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젊은 시절부터 민주화를 외쳤다”며 “돈이 많아도 빈부격차가 심하면 살기 좋은 나라는 아니다. 사실상 김 전 대통령에 의해 우리나라 산업화·민주화가 꽃을 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평가했다.
‘폭정종식 민주쟁취 비상시국연대’ 측은 “현 정권의 실정에 따른 부작용을 해소하려면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인 자유를 회복해야 한다”며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이 확립한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노력이 이뤄진다면 현재 당면한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오주한 기자 / 시각이 다른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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