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에겐 적극적이고 활동적으로 평생을 살아온 당당함이 있었다. 자기 확신이 뚜렷한 사람이 풍기는 자신감이 마르고 자그마한 체구의 그녀를 거인처럼 보이도록 했다. 사려 깊은 눈으로 에바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다 괜찮아. 모든 걸 믿고 맡기렴.’
마음이랄 수도 있고 에너지라고 할 수도 있는 그 무언가가 연못에 퍼져 가는 동심원처럼, 소리 내어 전하는 말보다 훨씬 명료하게 내 안으로 전달되었다. 축복은 소리 내지 않고 뜻으로 전할 때 더 빠르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사람과 사람이 나눌 수 있는 온기와 평온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녀의 미소와 눈빛을 통해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에바 크라우스 박사님의 건강을 위해 건배합시다.”
그때 연단에 다시 오른 본부장이 건배를 제의했다.
“트러스트 미 회원 모두를 위해 건배하지요.”
에바가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잔을 들어 그녀를 반겼다.
“새해에도 트러스트 미!”
본부장이 높이 잔을 들고 큰 소리로 힘차게 건배를 외쳤다.
“트러스트 미!”
“트러스트 유!”
회원들이 행복하고 유쾌하게 다 같이 외쳤다. 에바가 하운의 잔과 나의 잔에 건배했다.
“우린 또 만나게 될 거예요.”
에바가 나에게 말했다. 내 상황을 모를 리 없을 것 같은 그녀의 말을 나의 뇌는 ‘넌 살 수 있어’라는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확대 해석했고 신앙처럼 믿고 싶어 했다. 나는 그녀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길 바랐지만 에바는 많은 사람과 인사를 나누며 천천히 홀을 빠져나갔다.
에바를 에스코트하며 나갔던 하운은 멀리 배웅한 건 아니었는지 이내 돌아왔다. 그러나 전화 통화 중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기다리라는 눈짓을 하고는 소용돌이 모양의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다시 지루해져서 테이블을 한 바퀴 돌며 간단히 요기했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와인을 한잔 더 마시며 기다렸지만 하운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눈이 마주치면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마이크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내 마음은 온통 하운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와인을 한 병 집어 들고 하운이 사라진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계단 끝에 문이 닫혀 있었다. 손잡이를 돌리자 문이 열리고 건물 옥상인 듯 텅 빈 공간 위로 밤하늘이 보였다. 바깥인데도 실내와 기온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난간 밑으로 아래층과 연결된 정원이 보였고 더 아래쪽으로는 도시의 야경이 눈부셨다. 하늘엔 무수한 별들이 크고 밝게 빛났다. 이 건물이 어느 정도 높이에 있는 것인지, 서울의 어디쯤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지붕 난간에 기대서서 술 한 모금을 마셨다.
“나도 한잔 주세요.”
하운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예요.”
아래층 현관의 경사진 지붕 위에 무릎을 세우고 누워 있던 하운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붕 안 내려앉아요?”
반가운 마음을 감추려고 실없이 농담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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