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갈림길에서
나는 인생을 선택의 연속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선택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결정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타의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도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기본적으로 부모님이 자식의 인생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북한에서는 부모님보다 노동당에 의해 자식이나 개인의 인생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다. 북한은 일체 선택의 자유가 없는 곳이니까….
내가 대남 공작원이 된 것은 처음부터 스스로 선택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다.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될 당시 내 나이가 어렸던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최종적으로 내가 동의했기 때문에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되기는 했지만, 북한의 상황을 감안하면 나를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한 노동당이 내가 인생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유도 목적도 모르는 채 노동당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선발되어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수용시설(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대남 공작원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오로지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만을 다짐하며 부모님이 내게 주신 이름조차 지워진 채 ‘죽기 위해 살아야 하는 운명’으로 살아야 했던 나의 삶은 처음부터 내가 선택할 권리조차 없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북한의 독재체제하에서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첫발을 내딛는 바로 그 순간, 4남2녀의 맏아들로서의 평범했던 내 삶의 궤적은 연기처럼 사라져 재탄생될 것임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우연히 간부의 눈에 띈 소년, 북한식 길거리 캐스팅
고등중학교 4학년 때인 1980년 3월 초 어느 날. 학교 정문으로 군당(郡黨)책임비서 전용 지프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들어섰다. 그리고 교사(校舍) 현관 앞에 멈추더니 군당책임비서와 다른 한 명의 간부가 차에서 내려 교장선생님 집무실로 향하는 것이었다. 군당책임비서는 내가 이미 군(郡)사로청(현재의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에서 개최하는 회의에 참석했을 때 여러 번 봤던 적이 있었고, 또 그의 아들이 나와 같은 연배인 관계로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군당책임비서 일행이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교장 선생님이 4학년 남자 아이들만 교사 뒷마당에 집결시켰다. 시골 학교라서 당시 모였던 남학생이라야 70여 명밖에 안 되었다. 부교장 선생님이 밖으로 나온 4학년 남자 아이들을 모두 키 순서대로 한 줄로 세우자 군당책임비서와 같이 차를 타고 온 젊은 간부가 인원을 절반으로 가르더니 키 작은 아이들은 교실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러고는 키가 큰 아이들만 세워놓고 찬찬히 살펴보더니 그중 나를 포함해 5명을 손가락으로 지명해 불러낸 다음 우리를 데리고 교장선생님 사무실로 가는 것이었다.
당시 5명의 아이들을 선발해 데리고 갔던 간부는 나중에 알고 보니 군당 조직부 간부과 지도원이었다. 원래 군당 조직부 간부과는 노동당 간부만을 선발·임명·해임하는 등의 인사 업무 전담 부서이다. 행정·경제기관 간부들에 대한 인사 업무는 조직부 간부과에서 하지 않고 독립 부서로 존재하는 간부부에서 담당한다.
교장선생님 집무실에는 이미 군당책임비서가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군당책임비서와 지도원은 서로 번갈아 가며 다섯 명의 아이들에게 이름·나이·건강 상태 그리고 부모의 이름과 직장 직위 등을 질문하면서 수첩에 열심히 메모했다. 그러더니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냥 이젠 됐으니 수업에 참가해도 된다며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이유도 알 수 없는 간단한 면담을 마치고 돌아와 다음 수업을 듣고 있는데 누군가가 교실 문을 두드리더니 수업을 하고 있던 선생님에게 나를 다시 교장선생님 집무실로 호출한다는 연락을 전해 주었다. 집무실에 들어가니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군당책임비서와 지도원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내 이름과 나이를 재확인하고 계속해서 건강 상태·취미·학과 성적 그리고 가족관계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질문했다. 그 후 나를 돌려보내면서 학교에 이야기해 놓을 테니 3일 후에 군당 조직부 간부과로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공부와 생활을 잘하고 건강에도 특별히 유의하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군당(郡黨)에 의한 1차 선발
그로부터 3일 후, 나는 군당 간부들의 지시대로 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의 승인을 받고 군당청사가 있는 읍까지 걸어갔다.
지금은 물론 당시에도 교통 사정이 좋지 않아 북한 주민들은 80리(32㎞) 거리는 하루에 걸어서 이동한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군당 청사가 있는 읍까지 10리(4㎞), 걸어서 1시간 정도였으니 나도 아침 일찍 집을 떠나 걸어서 군당 청사로 향했다.
군당 청사 정문 접수창구 간부에게 조직부 간부과에서 불러서 왔다고 이야기하니 들어가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다. 이어 군당 조직부 간부과 간판이 걸려 있는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가니 그곳에는 다른 학교에서 선발되어 온 20여 명의 내 또래 남자 아이들이 이미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며칠 전 학교에 찾아왔던 군당 간부과 지도원은 나에게 오느라고 수고했다면서 다른 친구들을 가리키며 앞으로 같이 다니게 될 친구들이니 서로 잘 도와주라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군당으로 호출한 인원이 모두 도착하자 우리를 데리고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군(郡)인민병원으로 가서 신체검사를 받게 했다.
신체검사가 끝나자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며칠 후에 다시 부르면 그때 군당 간부과로 찾아오라고 당부했다.
며칠 지난 후 연락이 와서 또다시 군당 간부과에 들어갔는데 그때는 신체검사에서 통과된 아이들 10명 정도가 있었다. 군당 간부과 지도원은 거기에 있던 모든 아이들에게 간부문건(서류)을 나누어 주면서 쓰는 방법을 가르쳐 준 다음 집에 가서 해당 내용을 기재해 가지고 3일 후에 다시 군당 간부과로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북한에는 간부로 임용되기 전에 본인이 작성해야 하는 간부문건(서류)이 3가지가 있다. 이력서·자서전(일종의 자기소개서)·가계표 등이다. 가계표는 가정의 입출금 관계를 기록하는 가계부(家計簿)가 아니라 가족 및 친척관계 즉 가계(家系)를 기록하는 서류를 말한다.
나는 군당 조직부 간부과에서 나누어 준 간부문건을 집으로 가지고 돌아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해당 내용을 모두 기재했다. 그리고 3일 후 다시 군당으로 가서 그것을 간부과 지도원에게 제출했다. 그 전에 보았던 다른 친구들도 모두 왔었는데 간부과 지도원은 우리에게 넘겨받은 문건 내용을 검토하면서 필요한 내용을 그 자리에서 물어보고 보충하는 등 대체적인 파악이 끝난 다음 우리를 돌려보냈다.
군당 간부과 지도원은 아이들에게 학교에 돌아가 예전보다 공부도 더 잘 하고 조직생활도 잘하며 특히 사고를 내지 말고 건강에 신경을 써서 감기에도 걸리지 말라고 특별히 강조했다. 또한 앞으로 군당과 도당(道黨)에서 여러 차례 호출할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간부들과의 담화(면접 또는 면담)도 해야 하니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물론 노동당의 정책·노선과 관련된 내용을 집중적으로 공부해 두라고도 당부했다.
그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3월 말경, 또다시 군당 간부과에서 불러서 가 보니 지난번에 나와 같이 신체검사를 받은 친구들 일부와 처음 보는 친구들을 포함해 모두 다섯 명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까지 6명인 셈이었다. 군당 간부과 지도원은 다시 친구들을 서로 인사시킨 다음 한 명씩 개별적으로 불러 당시 노동당의 정책과 관련된 내용을 몇 가지 물어본 다음 또 다시 군(郡)인민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기존에 받았던 신체검사를 다시 받도록 했는데,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좀 더 세밀했다. 계속해서 이와 같은 신체검사와 면접을 4월에 들어와서도 2회 정도 반복하게 했다.
4월 말경, 군당 간부과에서는 또다시 나와 다른 아이들을 불러 신체검사를 실시하도록 한 다음 지난번과 같은 내용의 당부를 하고 앞으로 2~3주 후에 도당(道黨)에 올라갈 예정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러면서 그 전까지 집중적으로 당의 유일사상 체계와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 그리고 김일성주의와 최근 노동당의 노선과 정책 관련 내용을 공부해 두라고 이르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당의 유일사상체계라는 것은 한마디로 김일성의 사상 및 지도 체제와 관련된 내용을 말하고,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라는 것은 김정일의 영도체제와 관련된 내용을 일컫는다. 그리고 김일성주의라는 것은 말 그대로 김일성주체사상과 이론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며, 노동당 정책이라는 것은 당시 북한 노동당이 제시한 각종 정책을 가리켜 부르는 말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해 보려 한다.
아들: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제가 중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부모들 사이에서 옮겨지기 시작한 아버지 이야기가 결국 친구들에게까지 퍼지면서 그 당시 엄마를 비롯해 우리 가족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던 적이 있어요.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사실 관련 기관이 아니고서야 아버지 신상에 대해 그리 상세히 알아내는 게 어찌 가능했을까,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지극히 개인적인 신상까지 굳이 가십거리로 만들어야 했을까? 가끔 그때 일이 떠오르곤 해요. 그 후에도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아버지가 정말 전향을 했는지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면 아들인 나도 이성적으로 참아 내기가 어려웠는데, 당사자인 아버지는 어떠셨을까, 항상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누군가가 아버지에게 전향을 한 것에 대한 의심을 했을 경우 아버지는 어떻게 하셨나요?
아버지: 너의 말처럼 내가 진짜 전향했는지 의심하는 사람이 처음에는 상당히 많았고, 심지어는 지금도 내가 전향했는지 의심하는 사람이 있어. 그런데 나는, 내가 진짜 전향했는지 의심하는 그런 사람의 생각이나 말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아. 왜냐하면 내가 전향한 것은 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한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부끄러운 일도 아니니까….
‘전향’이란 말 그대로 방향을 바꾼다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내가 처음에 가졌던 신념이나 사상을 다른 것으로 바꾸거나 버린다는 거야. 사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이 반일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을 전향시켜 보려고 고문까지 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이 심했지. 그래서 일본인의 강요에 못이겨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친일 인사’ ‘친일파’로 전향한 사람이 적지 않아.
그때는 ‘전향’이라고 하면 곧 ‘친일파’나 ‘매국 역적’을 의미하는 단어였지. 그리고 그때부터 ‘전향’이라는 용어가 부정적인 개념으로 인식되었어. 그래서 ‘전향’이라고 하면 지금도 상당히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그러나 지금은 일제시대와 달라. 나는 자신이 예전에 갖고 있던 신념이나 사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 그것을 바꾸거나 버리는 것, 즉 전향하는 것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해.
나는 북한에 있을 때부터 내가 태어나 어려서부터 배워서 알고 있던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이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거든. 거기에다 나 때문에 죄 없는 가족까지 숙청되었기 때문에 북한에서 갖고 있던 이념과 사상을 버렸어.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인권이 진정으로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이념이 옳다고 인정하고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항상 떳떳하게 살고 있어.
내가 너희들에게도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정말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항상 얘기하는 것도 그 때문이야.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기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국방의 의무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고.
▲프로필
1962년 백령도에서 건너다보이는 북한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나 18세 때 노동당중앙위 대외연락부 남파 공작원으로 선발돼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1990년 1차 남파돼 거물 간첩 이선실 대동 복귀, 1995년 2차 남파돼 간첩망 구축과 고정간첩 접선 등 공작원 활동을 하다 충남 부여에서 검거됐다.
전향해 국군기무사령부(현 방첩사) 분석관과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을 지냈다.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는 대북전략컨설팅 대표로 있으면서 유튜브 ‘김동식의 북한 S파일’을 운영하고 있다.
박사 논문 ‘북한의 대남 혁명전략 전개와 변화에 대한 연구’와 저서로는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 ‘북한 대남 전략의 실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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