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구로반점이 뭐야. 이름이 뭐 그렇게 촌스럽냐. 호호호”
그들은 그녀 앞에서 노골적으로 놀려대고 약올리듯 빈정거렸다. 구로반점이라는 이름을 라라가 지은 줄 알고 고의적으로 그러는 사람도 있었다.
“주원 엄마는 식당하는 사람 이미지가 아니죠, 다방이라면 또 몰라도. 호호홋!”
그들의 놀림과 모욕은 그런 식이었다. 헐뜯고 싶은 상대가 있는데 때마침 조롱할 이유와 구실을 찾아낸 듯 그들은 신이 났다.
그럴 때마다 라라에게는 그녀들에 대한 분노보다 준호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솟구치곤 했다. 그녀들, 즉 주재원 부인네들에 대한 서운함은 상황을 모르는 자들의 무지의 소치로 돌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비웃음과 놀림의 원인 제공자인 준호만큼은 용서가 되지 않았다. 구로반점이, 결국 남편 준호에 대한 라라의 인내와 인고의 결과인 양 형체를 드러냈을 때, 준호에 대해 그녀가 느낀 분노와 배신감은 치욕감을 동반했다.
처음 음식을 팔고 돈을 받던 날, 라라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수모감과 억울함이 라라를 거의 울게 했다.
‘내가 원해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대접하던 음식을 이제는 돈을 받고 팔아야 한다. 모든 게 그렇지 않은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즐거움으로 하던 일이 생계를 위한 강제이고 의무가 되면 그 기쁨도 빛을 잃어버린다. 예를 들어, 공부도 그렇다. 자기가 좋아서 할 때는 즐거움이 되지만,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일 때는 고통이 되듯 말이다.’
파랑새에서 일하는 사람 중 라라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사람이 이라였다. 이라는 간호학과를 나와 병원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한국계 혼혈인 그녀는 맛을 내는 법을 가르쳐주면 간이 잘 맞게 끓여내곤 했다. 한국 사람들조차 한국 요리사가 해내는 음식으로 여겼다.
그러나 다리야나 베라가 만든 음식은 홀에서 퇴자맞기 일쑤였다. 서빙하는 웨이트리스 여자애들이, 손님이 주인을 불러오라고 한다며 울상을 짓고 들어오곤 했다. 무례한 사람일 경우, 그릇을 거의 뒤집어버릴 듯 손으로 탁탁 거칠게 음식 그릇을 밀쳐가며 항의했다.
“이걸 먹으라고 준 거요? 직접 먹어봐요. 이걸 돈 주고 먹으란 말이요?”
라라가 얼굴이 홍당무가 돼서 땀 뻘뻘 흘리며 사과하고 다시 해드리겠다고 겨우 진정시키면 기다렸다 먹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 시간이 없다며 큰소리로 휑하니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탓에 다리야와 베라에게는 까다로운 손님의 음식은 잘 맡기지 않았으나 이라가 쉬는 날에는 그런 상황이 드물지 않게 벌어지곤 했다. 그런 다리야와 베라가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건 그들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베라는 그나마 산더미처럼 쌓인 채소며 반찬거리 밑손질이라도 후다닥 해내는 재주가 있었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나름 고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문제는 다리야였다. 그녀는 사회주의식 대충대충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 그녀에게 주방장을 맡긴 건 오로지 연장자라는 이유에서였다.
“요리하는 노동자들이 해준 음식을 고맙게 먹어야지, 무슨 불평을 한단 말이요.”
다리야는 자본주의 사회의 고객이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까탈스러울 수 있는지 상상도 이해도 못 했다. 그녀는 네 것도 내 것도 아닌 일을 대하는, 소련 사회주의식 습성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그녀의 모든 표정과 행동은 마치 해주는 대로 먹지 무슨 말이 많아라고 웅변하고 있었다.
“유좐은 사람들이 유별나요. 왜 음식이 아무 문제도 없는데 트집을 잡아요? 나는 한국 주방장 할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만들었어요. 그냥 우리 고려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괜히 얕보고 그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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