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기후 등으로 열대야가 지속되면서 여름철 전력 수요가 공급 한계치에 근접했다.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송전망을 확충하고 전력 소비를 효율화하기 위해 전기요금을 올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올 들어 이달 21일까지 전력 총수요 추계치가 100GW를 넘긴 날은 8월7·12·13·14·19·20일 총 6일로 집계되면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국내 발전 가능 총 전력 용량은 149GW에 달하지만, 이 중 약 33GW(22.1%)는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변동되는 신재생에너지다. 풍력·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는 날씨가 좋지 않으면 발전량이 뚝 떨어지므로 100GW 수준의 전력 수요는 현재의 국내 전력망에 부담이 되는 수준이다. 이미 2011년에 블랙아웃 사태가 일어난 적이 있다.
특히 경제안보 시대 미래산업의 게임체인저로 꼽혀 전 세계가 전력을 투구하고 있는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데이터 산업은 많은 전기를 소모해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리고 있다. 정부는 AI 보급과 반도체산업 육성으로 2038년 전력 수요가 128.9GW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전기차·자율주행차도 모두 전기 먹는 하마다.
최근 벌써 정부가 안정적인 공급 기준선으로 설정한 ‘예비 전력률 10%’를 밑도는 날이 잇따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상기후 확산 가능성은 물론 첨단산업 육성을 감안해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선 양질의 전력 공급이 가능해야 하는데, 양질의 값싼 전력은 원자력이다.
우리나라 에너지 중장기 계획인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2024~2038년)’이 부처 간 협의 시한을 넘겼다. 당초 11차 전기본은 계획 기간이 시작되는 올해 이전인 지난해 하반기까지 마무리했어야 하지만,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와 환경부의 협의가 지연되면서 8개월이 지나도록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정부가 밀어붙인 탈원전 정책의 여파로 에너지 수급 체계가 심각하게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최근 세계적인 AI 확산에 따른 구전난(求電難)이 심화돼 중장기정책 수립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상황이다.
지지부진한 우리나라와 달리 해외 각국은 법을 만들고, 중장기 전력 정책 목표를 내놓으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2022년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라 러시아로부터의 천연가스 공급이 막히며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을 절감한 각국이 원전의 비중을 늘리는 목표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미국에서도 지난달 조 바이든 대통령이 ‘원전 배치 가속화 법안’에 서명하며 원전을 통한 전력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사용후핵연료를 처분할 수 있는 고준위 핵폐기물 처리장 설립도 지지부진한 상태다. 처리장 건립에는 양당이 동의하면서도 야당이 해상풍력 건설을 위한 특별법과 연계해 처리하자고 해서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이다.
송전망 투자를 확대하는 문제도 난항에 직면하고 있다. 송배전망 건설이 따르지 못해 수도권 전력 공급에 차질이 우려되고 있다. 송배전망 건설은 한전이 수행하고 있지만 막대한 한전 부채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전의 부채는 문 정부의 탈원전정책을 거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원전보다 4배 정도 비싼 신재생에너지를 구입하느라고 구입단가가 매출단가(주로 전력요금)를 뛰어넘은 데 따른 결과다. 2016년 말 50조 원이었던 한전 부채는 2021년 말 146조 원으로 세 배나 급증했다. 지난해 말에는 206조 원까지 상승하고 올해 말에는 212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어 전기요금 인상 정도로 해결될 수 있는 수준은 이미 넘어섰다.
전기요금도 이웃나라들보다 싼 것도 아니어서 기업들은 전기요금도 싸고 인건비도 싼 동남아 등지로 옮겨 가고 있는 실정이다. 한 정부의 정책 실패를 해결하는 데는 몇 배나 더 오랜 기간과 국민의 고통이 따른다는 점을 보여 주는 실례다. 결국 국민 부담으로 귀결될 특별법이 제안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설상가상 ‘님비’ 현상도 송전망 확충을 가로막고 있다. 동해안 등에서 생산한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는 데 필요한 하남 변전소 증설이 하남시의 불허로 수도권 전력 공급에 차질이 우려되고 있다.
한전은 수도권 전력망 확충 계획에 따라 경북 울진에서 신 가평을 거쳐 동서울 변전소까지 280km의 동해안-수도권 초고압 직류(HVDC) 송전선로를 2026년까지 완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전력 대란을 막기 위한 송배전 건설 사업은 님비 현상 ·환경단체 반발 등으로 부지하세월이다.
경제안보가 걸린 전략산업 육성은 국가경제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정치권은 물론 국민 모두의 대승적 결단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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